법륜스님의 법문/2. 불교의 역사

[법륜스님의 '불교의 역사'] 제6강 소승불교 - 세 번째

상원통사 2014. 9. 17. 22:54

(~~ 제5강에서 계속)

 

다음은 소승불교의 수행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37조도품 : 사념처, 사정근, 사신족,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
(37助道品 : 四念處, 四正勤, 四神足, 五根, 五力, 七覺支, 八正道)
중생이 수행을 하기 시작을 해서 성도(해탈의 경지)를 하는데 까지,
소승불교에서는 37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이를 37조도품이라 합니다(대승불교의 화엄경에서는 52위).
이 37조도품은 4념처, 4정근, 4신족, 5근, 5력, 7각지, 8정도입니다.
그 중 첫 번째, 사념처(관신부정, 관수시고, 관심무상, 관법무아)에 대해서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관신부정(觀身不淨) : 몸은 깨끗하지 못하다
우리는 에 대해서 늘 집착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몸은 깨끗하고 성스러운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몸에 뭘 먹이고 입히고 바르고 이렇게 하려고 합니다.
몸에 대해 집착을 하면 해탈하기가 어렵습니다.

 

관(觀)이라는 것은 ‘있는 그대로 본다’ 는 뜻입니다.
이렇게 앉아서 호흡을 정지한 이후에 자기 몸을 관하여, 있는 그대로 가만히 들여다보면,
눈에는 눈꼽이, 코에는 콧물이, 입에는 침과 가래가, 귀에는 귀지가 나오고, 배에는 똥이 가득 차있습니다.
또 이것이 썩는 것을 보면 온갖 진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몸이라는 것은 얼른 보면 굉장히 깨끗하고 성스러운 것 같지만,
사실은 갖가지 오물로 되어있고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몸이라는 것은 더럽다는 뜻이 아니라, 깨끗하거나 성스러운 것이 아니기에,

아니 不 깨끗할 淨자를 써서 부정(不淨)이라 합니다.
깨끗하거나 성스러운 것이 아니기에 집착할만한 게 못됩니다.
이것은 곧 허물어지고 늙고 병들어 사라져버릴 그런 것입니다.
봄에 핀 잎사귀 하나가 가을되면 떨어져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지 애지중지할 만한 게 못됩니다.

 

이렇게 ‘몸은 깨끗한 게 아니다’ 라는 것을 관함으로서 몸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입니다.
몸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집착하는 것이 많이 없어집니다.
뭘 먹을까, 뭘 입을까, 뭘 바를까, 어디에 잘까 이런 게 몸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몸에 대한 집착을 놔버리게 되면 이런 것으로부터 자연스러워집니다.

 

이 수련을 위해 남방불교에서는, 시체를 알콜로 처리하고 배를 갈라 창자를 다 드러내 앞에다 놓고 공부를 합니다.
요즘은 혐오감을 일으킨다 해서 사람들에게 잘 안 보여줘서 그렇지 태국같은 곳에 가면 아직도 그렇게 합니다.
또 백골관이라해서 해골을 앞에 두고 늘 보면서 자기 몸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수련을 합니다.

 

관수시고(觀受是苦) : 느낌은 괴로움이다
두 번째는 관수시고, 느낌입니다.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귀로 듣고 손에 닿으면 느낌이 일어납니다.
우린 괴로운 느낌은 싫어하지만, 즐거운 느낌에서는 기쁨이 일어나고, 거기에 맛을 들이고 살고 있습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그림을 보고, 좋은 냄새를 맡고, 부드러운 옷을 입으며 기뻐하는 데,
이 모든 즐거운 느낌이라는 그것마저도 사실은 괴로움의 씨앗입니다.
마치 쥐가 쥐약을 먹는 것처럼, 짧게 보면 기쁨이지만 그게 되돌아오는 과정을 보면 다 괴로움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여실히 관찰하는 것이 관수시고인데, 우리는 그 맛에 중독이 되어있기에 관신부정보다 이게 더 안 됩니다.

 

관심무상(觀心無常) : 마음은 항상하지 않고 계속 변한다
세 번째는 관심무상, 우리 마음 안에는 생각과 의지 이런 게 들어있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을 잘 살펴보면 마치 바다에서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처럼
한 생각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마치 물이 출렁거리듯이 그렇게 생멸을 거듭합니다.
찰라에 구백생멸한다고 하듯이 마음이라는 것은 항상한 게 아니라, 출렁대고 계속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남편이 결혼할 때 약속을 했다하더라도 남편 마음이 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어린 아이가 뭐라고 약속을 해도 이튿날 변하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근데 여러분들은 변하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항상하지 않는 걸 항상한다고 생각하고, 변하는 걸 안변한다고 생각하니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을 갖고 논해야지, 옛날 얘기 해봐야 속만 타고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연애할 때 나보고 결혼하면 어떻게 해준다고 하지 않았냐, 그런 얘기하면 자기 속만 탑니다.
지금 처지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이렇게 생각을 해야 됩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영원한 게 아니고 시시때때로 변하는 것입니다.

 

관법무아(觀法無我) : 존재는 실체가 없이 인연을 따라 형성된다
네 번째는 관법무아,
선이니 악이니, 옳으니 그르니, 약이니 독이니 하지만 그 속에는 실체가 없고,
다 인연을 따라서 관계 맺어서 형성된 것입니다.
내가 지금 선생님이라고 불리지만 내 안에는 선생님이라고 할 만한 게 없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인연에 따라서 선생님이라고 불릴 뿐이지, 내 속에 선생이라고 하는 요인이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아가 없는 걸 아가 있다고, 항상하지 않는 것을 항상하다고, 괴로운 것을 즐거움이라고, 독을 약이라고,

깨끗하지 않는 걸 깨끗하다고 잘못생각하고 세상을 사니 하는 일마다 다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 잘 봐야 되고, 그걸 놓치지 않아야 됩니다.

 

다음은 소승불교의 사무량심(四無量心 = 자무량심, 비무량심, 희무량심, 사무량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대승불교에도 있지만, 원래는 소승불교의 교리입니다.

 

자(慈) : 사랑은 나누어라
자무량심(慈無量心),
사랑은 남과 나누어라, 즐거운 게 있으면 남하고 나누어주라는 말입니다.
기쁨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말이 있듯이, 사랑은 나누어 함께 하라는 말입니다.

 

비(悲) :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들어줘라
비무량심(悲無量心),
다른 사람의 괴로움은 내가 덜어준다는 말입니다.
괴로움과 슬픔은 서로 나누어 가질수록 적어집니다.

 

희(喜) :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보고 기뻐하라
희무량심(喜無量心)
, 다른 사람이 잘되는 걸 보고 기뻐해주라는 말입니다.
사촌이 논 사면 배 아프다는 말이 있듯이, 남이 잘되는 걸 보면서 기뻐하는 게 잘 안됩니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차가 뒤집어져 자기 팔이 부러졌습니다.
부러진 팔을 안고 일어나 둘러보는데 다른 사람이 다 죽어있다면 ‘재수 좋다!’ 이렇게 되고,
다른 사람이 아무도 안 다치고 멀쩡하면 ‘재수 없다!’ 이렇게 됩니다.
내 팔은 부러졌지마는 다른 사람이 안 다쳤으니까 ‘참 잘됐다’ 이렇게 생각해야 되고,
다른 사람이 죽으면 그것을 안됐다고 생각해야 되는데 우리 마음이 안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되는 걸 보고 기뻐해주는 일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捨) : 평등심, 이 세상 어떤 것도 차별을 두지 말라
사무량심(捨無量心),
사라는 것은 버림인데, 평등심을 말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에 대해서도 차별을 두지 말라,
신분, 성별, 신체, 종교, 나라 등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차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기쁨과 사랑은 나누어주고, 괴로움과 슬픔은 나누어가지고, 
다른 사람이 잘되는 걸 보고 기뻐해주고,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한다,
그런 마음이 한량없다, 이게 사무량심(四無量心)입니다.
 

다음은 사섭법(四攝法 = 보시섭, 애어섭, 이행섭, 동사섭),
섭(攝)이라는 것은 ‘함께 한다, 하나가 된다’ 는 뜻으로, 사섭법(四攝法)이란 네 가지의 ‘하나가 되는 법’을 말합니다.

 

보시섭(布施攝) : 가진 것을 남에게 나누어 준다, 재시, 법시, 무외시
내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줘서 하나가 되는 게 보시섭입니다.
나누어 주는 데는 재시, 법시, 무외시 이렇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내가 재물을 가지고 있다면 없는 사람과 나누어서 함께 가지는 것(재시),
내가 가진 깨달음이 있다면 그것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어 가지는 것(법시),
아이가 땅에 넘어져서 울거나 괴로워할 때, 그걸 들어주고 위로해주고 달래주는 게 무외시입니다.

 

애어섭(愛語攝) : 이익되는 말을 해서 즐겁게 하는 것
애어섭은 다른 사람에게 사랑하는 말, 위로하는 말, 이익되는 말을 해줘서 그를 즐겁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행섭(利行攝) : 다른 사람을 이익 되게 하는 것
이행은 다른 사람에게 이롭게 해주는 것입니다.
정보를 주든지, 재물을 주든지, 그 사람에게 이익이 되도록 해주면 좋아하겠지요

 

동사섭(同事攝) : 함께 해주는 것
동사섭은 함께 해주는 것인데, 네 가지 중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괴로우면 함께 괴로워해주고, 슬퍼하면 함께 슬퍼해주고, 어려운 처지도 같이 함께 해주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잘못하더라도 ‘너하고 나하고 차이가 난다’ 고 생각하면 되는데, 동사섭은 ‘너하고 나하고 똑같다’ 이겁니다.
뭔가 실수를 했는데, 뭔가 나쁜 짓을 했는데, 그냥 용서해주는 것 같으면 상대가 기분 나쁠 수 있습니다.
‘나는 못났고, 너는 안 그러니 너 잘났다’, 이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나도 같이 실수를 해서 같은 못난이가 되어줌으로서 그를 위로하는 게 동사섭입니다.
우리 역사 속에서 원효대사 같으신 분이 동사섭에 아주 탁월했습니다.
뱀 잡는 사람과도 같이 놀고, 뽕 따는 아낙네와도 같이 놀고, 도둑놈과도 같이 어울려 있으면서
내가 너를 가르친다는 인식이 전혀 없도록 하면서 함께 하는 것을 동사섭이라 합니다.
제가 이렇게 여러분께 법문하는 것은 동사섭이 아닙니다.
동사섭은 여러분과 똑같은 모양을 하고 똑같은 형식을 하고 같이 똑같이 지내면서
그 사람을 통해서 배운다는 생각도 없이 배우고 함께 하면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4가지 은혜 : 부모의 은혜, 중생의 은혜, 나라의 은혜, 삼보의 은혜
그다음은 네 가지 은혜를 알아야 됩니다.
첫 번째, 부모의 은혜 알아야 됩니다.
부모님이 나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온갖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 중생의 은혜입니다.
밥 한 톨 속에도 세상 사람의 온갖 노고가 다 들어있고, 실타래 속에도 베 짜는 여인의 피땀이 서려있습니다.
사람의 노고만이 아니라, 온갖 미생물과 태양·물·공기의 노고까지 다 들어있습니다.
안보이니까 함부로 하지, 보인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껴 쓰고 소중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다음은 국왕의 은혜인데 요즘으로 해석하면 나라의 은혜입니다.
자기나라 말을 같이 쓸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고, 외국에 나가보면 제 나라의 은혜를 알 수 있습니다.
네 번째, 삼보의 은혜입니다.
불법승 삼보가 있음으로 해서 내가 깨달음으로 이를 수가 있습니다.
 
나를 낳아주고 키워준 게 부모의 은혜라면, 내가 하루하루 생존해 나가는 것은 중생의 은혜입니다.
내가 이렇게 활동을 하고 차별 받지 않고 사는 것은 나라의 은혜이고,
내가 지혜를 얻어 깨달음의 길로 갈 수 있는 것은 삼보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소승불교에서 수행하는 법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이 강의는 '정토회 > 정토TV > 법문 보기 > 불교의 역사'에서  동영상으로 볼수 있습니다.

 

 

*** 짧은 생각 ***

 

아이구, 우리나라가 소승이 아닌 것이 천만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