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불교의 역사, 두 번째 강의시간이 되겠습니다.
경(經, 수트라, sūtra) : 부처님의 말씀을 모아서 편집한 것
율(律, 비나야, vinaya) : 불자가 지켜야할 실천 덕목에 관계되는 말씀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고 나서 그 제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아 편집을 했는데,
부처님의 말씀을 모아서 편집한 것을 수트라, 경이라 말하고,
불자가 지켜야 할 실천 덕목을 모아놓은 것을 비나야, 율이라 합니다.
대중들은 경과 율에 따라 진리를 체득하고 계율을 지키며, 부처님이 살아계실 때나 다름없이 수행정진을 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불교가 다른 지역으로 넓게 전파되고 시대가 바뀌면서,
사회는 화폐경제로 바뀌고 생활조건과 생활방식들도 바뀌었기에,
그 사회 속에 살다가 출가해서 들어오는 스님들의 의식도 조금씩 바뀌어가게 됩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엄격하게 옛날 그대로 지켜야한다’ 는 주장도 있고,
‘소소한 것들은 시대에 맞추고 지역에 맞춰야 한다’ 는 주장도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런 견해 차이는 부처님의 말씀인 경보다 실천 규범인 율에서 주로 나타나는 데,
정말 수행하고자 발심을 하면 사실 이건 별 문제가 안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즉 부처님이 그날 먹고 저축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소금은 며칠까지 두고 먹어야 한다’ 를 이야기하신 것이 아니고,
하루에 한 끼 먹되 오전에 먹자는 것도, ‘오전에 먹으면 깨닫기 쉽고 오후에 먹으면 깨닫기가 어렵다’ 는 뜻이 아닙니다.
‘수행자는 음식에 탐해서는 안 된다’, 즉 먹는 것에 대한 집착은 내려놓자는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먹는 것에 대한 집착도 버리지 못한다면, 다른 공부는 하기가 어렵습니다.
'먹는 것이란 오직 육신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고 먹는다면, 싱겁고 짜고는 문제가 되는 게 아닙니다.
‘소금을 놔놓고 먹어도 된다’ 고 주장하는 것은 벌써 입맛에 집착을 하는 것입니다.
그 소금 하나는 별 문제가 아니지만, 이런 문제제기의 근본 뿌리는 음식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데 있습니다.
하루 한 끼만 먹으라 했지만, 환자나 어린아이의 경우엔 두 끼 먹어도 좋다고 말씀하셨는데,
건강한 사람이 굳이 규칙을 어겨가면서까지 12시 넘어서 먹어야하는지 생각해 볼 문제이며,
또 12시 넘어서 몇 숟가락 먹는다고 한들, 그게 깨닫는데 무슨 큰 문제가 되겠습니까?
사실은 문제가 될 게 없는데, 이걸 갖고 논쟁을 한다는 것은 음식에 대해 집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소소한 것을 받아들이게 되면, 앞으로 점점 요구가 늘어나 그 근본이 흐트러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수행하고자하는 마음이 진실하지 않으면 어떤 규칙을 정해도 늘 이렇게 문제가 됩니다.
수행을 할 마음이 없으니 계율이 속박이 되는 것입니다.
규칙은 우리 모두를 위해 정한 것인데, 자기 기호에 안 맞거나 자기 처지에 안 맞다고,
그걸 바꾸려고 하거나 합리화를 하려는 마음은 이미 수행자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은 수행을 굉장히 큰 걸로 생각합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포교하고, 경전을 읽고, 하루 몇 시간씩 참선하는 것을 수행 잘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자기가 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때 거기에 끌려가지 않고 놓아버릴 줄 알고,
하기 싫지만 꼭 해야 할 일이면 능히 해 버릴 수 있는 이런 마음가짐이 수행입니다.
기도시간 맞춰야 된다고 남편 밥도 안주고 절에 가고, 또 그 일로 인해 남편하고 다투면 안 되겠지요.
기도란 정해진 시간을 지켜야 하지만, 지키는 이유는 마음을 잘 가다듬고 게으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남하고 시비하고 다투면서까지 시간에 매인다는 것은 이미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십여 년 전에 어느 절에 있을 때, 신도님 100여 분 모시고 설악산 봉정암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모두 다 짐을 메고 올라가니 힘든 건 마찬가지인데, 몇 사람이 죽겠다고 하소연합니다.
그래서 그분들 짐을 옆 사람이 들어주니, 자기들은 가벼운 몸으로 재빨리 올라갑니다.
우리는 짐을 두 개 세 개씩 지고 힘들여 올라갔더니, 짐없이 올라간 이들이 이렇게 자랑합니다,
“우리는 벌써 108배 했다!”
무거운 자기 짐은 다른 사람에게 주고, 재빨리 올라가서 108배 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늦게 올라갔지만 상대방의 무거운 짐을 들어주는 것이 기도입니다.
빨리 올라가서 108배 한 사람은 자기 복만을 위한 욕심으로 한 것이고,
삼 배 밖에 못했어도 다른 사람 짐을 지고 올라간 사람이 용맹정진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수행이라는 것, 기도라는 것을 잘못생각하고 있습니다.
수행의 첫째가 욕심 버리기인데 늘 욕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모든 괴로움의 근본이 욕심으로부터 생깁니다.
욕심을 버리게 될 때 평화가 오고, 욕심을 버리게 될 때 참 복이 오는 것입니다.
또 만 괴로움의 원인이 자기주장을 세우는 데 있습니다.
회의 도중 자기 의견이 관철 되지않아 기분이 나빠진다면,
‘내가 내 의견에 집착하고 있구나’, 이렇게 돌이켜서 그걸 내려놓는 것이 수행입니다.
뭔가 특별한 것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매달리고 집착하는 것을 수행이라 생각하는데, 수행은 그런 게 아닙니다.
사람사이에 의견대립이 있을 때, 상대를 이해하고 자기 의견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게 수행이고,
재물을 두고 대립이 있을 때, 상대를 이해하고 자기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게 수행입니다.
계율의 어떤 형식주의에 빠지거나 계율이 몸에 부담스러운 이유는, 공부하고 싶지 않아서 생기는 것입니다.
계율이 있으면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고, 자기를 내려놓고 그냥 따라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면, 그 계율을 수정하자고 할 수도 있습니다.
왜?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행복하게 하고자 규칙이 있는 것인데,
그 규칙이 사람을 괴롭히고 번뇌를 일으키게 한다면 그것은 바꿔도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견해차이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견해차이가 나는 것하고, 견해 차이를 갖고 싸우는 것하고는 성격이 다릅니다.
그것을 어떻게 서로 이해하고 맞춰나가느냐 하는 것이 수행이고,
그걸 갖고 자기 옳다고 싸우는 게 세속인 것입니다.
그런데 출가한 사람들마저도 자기들의 주의와 주장을 고집하며 싸웁니다.
한쪽은 부처님의 정법이란 주장으로 그 형식을 고집하고(상좌부),
다른쪽은 부처님의 방편과 창조성을 내세워서 새로운 것을 고집합니다(대중부).
부처님의 말씀마저도 인간이 분별심을 내면 싸움의 도구, 싸움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법등명(法燈明) : “법에 의지하라,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
부처님께서는 이런 걸 염두에 두시고 법등명·자등명을 말씀을 하셨습니다.
‘비구들아 법에 의지하라, 사람에 의지하지 마라’ 고 하셨습니다.
자기가 공부를 하면서 혼자 깨달은 바나 스스로 느낀 바를 진리라고 주장하면 안 되고,
경이나 율에 견주어 합당한지 어긋나지 않는지 이걸 점검하는 게 법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자등명(自燈明) : “타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자기에게 의지하라.”
또 ‘타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라’,
이것은 자기 밖의 어떤 존재에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경이다 율이다 해서 거기 무조건 따라가서는 안 되고 늘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면서,
자기가 경험하고 체득해 가면서 하나하나 점검을 해나가야 됩니다.
이럴 때 우리는 바깥으로부터 주어진 것들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겁니다.
형식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한 것이 자등명이고, 자기 멋대로 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 법등명입니다.
이 자등명과 법등명이라는 두 개의 양약(良藥)을 가지고,
우리가 극단에 치우치는 것을 막고 늘 중도의 길로 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분별심을 갖고 있는, 망상을 갖고 있는 사람은 자등명·법등명마저도 자기를 합리화하는 데 써먹습니다.
경전이나 율에 어긋나더라도 자기의 주의·주장대로 밀고 나가고 싶은 사람은 자등명을 말하고,
고래로부터 내려오는 형식을 주장하고 싶으면 법등명을 말하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도 중생이 망상을 피우면 해결책이 없습니다.
아무리 하늘에서 비가 많이 와도 바가지 거꾸로 들고 있으면 물이 한 방울도 고이질 않고,
아무리 좋은 집에 비단 요와 비단 이불을 줘도 악몽을 꾸는 사람한테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자기를 살펴야 하고, 초발심 처음 마음을 낼 때로 돌아가서 늘 점검해야 됩니다.
상좌부와 대중부라는 근본분열 이후 여러 요인에 의해 부파가 갈라짐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고, 200년 정도 지난 후의 인도는 아쇼카 왕에 의해 통일이 됩니다.
통일왕국을 이룬 아쇼카 왕은 불교를 적극 후원하였기에 양적으로 엄청나게 팽창하였는데,
지역도 넓어지고 승려 수도 많아지고, 경제적·사회적 후원도 많아지고, 승려의 지위도 높아집니다.
그러나 아쇼카 왕이 죽고난 후 마우리아 왕조가 망하자, 인도는 여러 나라로 나뉘면서 불교도 분열이 되는데,
처음에는 율에 대한 견해차이로 상좌부와 대중부라는 근본 분열이 생기고 난 이후에,
지역별로 나뉘고, 나라별로 독립된 부파가 형성되기도 하고,
경전의 특별한 부분만을 더 중요시하는 특징도 나타나면서, 부파는 계속 갈라지고 또 갈라졌습니다.
이렇게 많은 부파들이 형성되어 나가면서 부파끼리 서로 경쟁을 하게 되는데,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이지만 부파가 다르니까 자기 부파가 더 옳다는 주장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부파의 입장에서 부처님 말씀의 요지를 논하고 경의 뜻을 하나하나 해석하는 논장이 출현하게 됩니다.
이 논장은 각 부파마다 독특하게 나타납니다.
한 논장을 쓰던 부파가 갈라지면 이 논장은 공통적으로 사용하지만, 갈라진 부파에서는 또 새로운 논장을 만듭니다.
그래서 어떤 논장은 한 부파만 사용하고 어떤 논장은 여러 부파가 공통적으로 사용합니다.
그럼 이 시대에 스님들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스님들도 출가를 하면 학생들처럼 배우고 공부하기 시작하는데 죽을 때까지 해도 부족합니다.
계율을 지키고 글자를 배우고 경전을 독송하고 주석서를 읽고 연구하고 발표해야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을 폐쇄된 승원 안에서 하다 보니까, 규칙은 엄격해지고 계율이 아주 중요시 됩니다.
또 일반 대중과 만나지 않으니 대중의 고통을 알고 그걸 치료해 줄만한 여가가 없습니다.
한편 일반 신도들은 불교경전이 자기나라 말이 아닌 팔리어로 되어있기에 읽을 수도 없고 그 뜻도 모릅니다.
그저 ‘부처님이 보시하면 좋다고 하셨다’ 하면 보시하고, ‘뭐뭐 하면 복 받는다’ 하면 그것을 지키고,
또 스님들이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얘기해주면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줄 알고 지낼 뿐,
일반신도들은 부처님의 법을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조선시대 이후 최근까지의 우리나라 불교와도 상황이 비슷합니다.
우리나라의 불교경전은 다 한문으로 되어있으니 그걸 알려면 우선 한문공부부터 해야 되는데,
시골 아낙네들은 글자도 모르고 공부한 적도 없고 예식도 모르니,
초 가지고 쌀 가지고 절에 가서 공양 올리면 좋은 줄 알고,
스님이 요령 흔들고 기도 해주면 뒤에서 절이나 꾸벅꾸벅하다가 법문 한마디 듣고 오는데,
그 법문이 경전에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알 수도 없습니다.
소외되어 있던 일반신도들 속에서 대승불교운동이 시작됨
이렇게 불교가 대중과 유리되니까, 새로운 불교 즉 대승불교 운동이 시작됩니다.
승단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던 일반 신도들이 ‘뭔지 모르지만 이건 아니다’ 라는 문제의식을 느끼고,
부처님을 그리워하며 가까이하고 싶은 싹이 터서 자란 게 대승불교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기존 승단(상좌부와 대중부)에서는,
부처님 경전도 모르고, 예식도 모르고, 율도 안 지키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들이
자기들끼리 어울려 불교를 한다고 얼토당토 않는 짓을 하고 있으니까,
‘비불설(非佛說)이다’, ‘부처님은 그런 말씀 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무시했습니다.
왕이나 부자들의 옹호 속에서 유지되는 승단은 장점도 있지만, 굉장히 위험한 요소도 갖고 있습니다.
한 왕국이 불교를 옹호한다면 그 왕국이 존속하는 동안은 흥황하지만, 망하게 되면 탄압을 받습니다.
옛날의 브라만교는 불교가 흥황하면서 그 세력이 줄어들었고, 이후엔 토착 미신과 결합한 형태로 유지하고 있었는데,
마우리아 왕조가 망한 후 새로이 일어난 왕국 중에는 이 토착신앙을 교리화하고 정리하여,
불교 대신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인도에 힌두교가 다시 부활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라에서 힌두교를 옹호하면서 소승교단에 후원이 끊기자 소승은 그 세력이 점차 줄어들었지만,
대승불교는 신도들을 중심으로 하니까, 나라의 후원이 없더라도 존속할 수 있었습니다.
대승불교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노력뿐만 아니고, 이런 사회적인 배경도 있었습니다.
(제5강에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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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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