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2. 불교의 역사

[법륜스님의 '불교의 역사'] 제3강 경전의 결집 - 세 번째

상원통사 2014. 8. 25. 21:16

(~~ 제2강에서 계속)

 

2결집 : 불멸 후 100년경, 바이샬리에 700인의 장로가 모여 결집

바이샬리(Vaiśālī) 비구들이 십사를 주장하자 전국에 있는 어른 스님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1결집은 500 장로가 모였는데, 이번에는 700 장로가 모여 세 가지를 결의했는데 이를 제2결집이라 합니다.

첫 번째 바이샬리 비구들의 십사(十事)는법이 아니다라고 결론을 냈는데,

열 가지 중 제일 큰 문제는 금과 은을, 즉 돈을 보시 받을 수가 있다’ 였습니다.

두 번째 1결집 때 편집이 안 된 경전이 있었는데, 거기에 대한 약간의 보완이 이루어졌고,

세 번째 1결집의 경전을 내용별로, 길이별로 분류작업을 했습니다.

 

대중 만 명이 제2결집에 반대하여 따로 결집하고 십사를 인정함.

이 제2결집은 불멸 후 약 100년경 이뤄졌는데, 정작 바이샬리에 살고 있는 대중들은 여기에 불복하여,

일만 명의 대중이 모여서 자기들대로 결집을 하였고 십사를 율로 인정했습니다.

이것이 교단이 둘로 나뉘어지는 시작이 되었는데,

십사를 비법으로 규정하고 원형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상좌부(Thera-vāda)라 하고,

시대와 지역의 상황에 따라 약간 변경할 수가 있다고 주장한 사람들을 대중부(Mahā-sāṃghika) 라 합니다.

이 사건을 겪으면서 바로 교단이 둘로 나눠졌다 하는 견해도 있지만,

이때는 양쪽의 견해차이이지 승단 자체가 나눠진 것은 아니다 라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불멸 후 200년 경 대천의 오사(五事)가 제기됨

이렇게 세월이 흘러가면서 의견은 점점 벌어지는데, 불멸 후 200년 경 대천의 오사 제기됩니다.

대천이 주장하는 다섯 가지 주장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 교재 38페이지에 있습니다.

이 기록은 어떤 부파에는 전해오지만 어떤 부파에는 전연 언급이 없기에 진위의 논쟁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옛날에 대천(大天, Mahādeva)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어머니하고 간통을 했습니다.

그걸 아버지가 알아차리자 아버지를 때려죽이고 딴 지역으로 도망을 가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어머니가 딴 남자하고 간통을 하니까, 어머니를 때려 죽였습니다.

이 사실을 한 고승이 알아차리자, 입막음하려고 그 아라한도 또 죽여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와 어머니와 성인을 죽인, 도저히 용서 못 할 죄인이 되었는데,

이런 대천이 불법을 만나 크게 뉘우치고, 삼장을 통달한 삼장법사가 되고, 왕의 스승인 국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대천의 제자가 옷을 빠는데 팬티에 뭐가 묻은 것을 발견하여 스승에 물었습니다.

제자 : 아라한이 왜 이런 일이 생깁니까?

대천 :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그런 성욕이 없지만, 몽중에 마왕이 번뇌를 부착하기 때문에 그럴 수가 있다.

이것이 첫 번째, 아라한은 번뇌가 없는 데 마왕이 번뇌를 부착한다

두 번째, 아라한은 큰 것은 환하게 다 알지만 자질구레한 일에 대해서는 무지가 있을 수 있다,

세 번째, 아라한의 판단에 대해 약간의 의혹이 남을 수도 있다,

네 번째부처님은 깨달으셨을 때 누구로부터도 인가를 안 받았지만, 아라한은 스승으로부터 인가를 받는다.

다섯 번째, 하루는 대천이 옛날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생각하면서 괴롭다고 말합니다.

제자 : 어떻게 아라한이 괴롭습니까?

대천 :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도 고에 빠지지는 않지만 고를 느낄 때가 있다.

 

이 의미는 '아라한은 완전한 게 아니라 조금은 불완전하다',

그러니 아라한 700명이 모여서 어떤 결론을 내렸다 하더라도,

'불완전한 사람들끼리 모여 결론을 낸 것 중에는 불완전한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불완전의 정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0.1%라도 불완전한 구석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상좌부에서는 이것은 옳지가 않다, 이것은 법이 아니다’ 라고 얘기했고,

대중부에서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도 이럴 수가 있다’, 이렇게 견해가 갈린 겁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이제는 서로 같이 할 수가 없다 해서 승단 자체가 완전히 독립됩니다.

하나는 상좌부라고 하는 승단으로, 다른 하나는 대중부라고 하는 승단으로 독립이 되었습니다.

공식적으로 분열된 것은 이 사건으로부터다 이렇게 말한 사람이 있고,

또 앞에서 말하는 10사로부터 분열이 되었다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아쇼카왕은 1천명의 장로를 불러 제3결집을 단행.

이렇게 분열 된 것이 아쇼카 왕 때인데, 아쇼카 왕은 두 교단을 화합시키려고 무척 노력했습니다.

그는 일천 명의 장로를 서울로 불러 모아, 왕궁 안에 있는 절에서 제 3결집을 단행했습니다.

3결집을 하면서 부처님의 말씀인 과 생활 지침인 에 더하여, 경과 율에 대한 해석인 이 추가되었습니다.

해석이라는 것은 부처님 말씀의 뜻은 이런 것이다 라고 해설하거나 부처님의 말씀을 요점정리한 것입니다.

 

(, Abhidharma, 아비달마) : (()을 해석하고 주석을 달아 설명한 것

3결집에는 논()장을 포함하여 결집함.

논은 아비달마(논장)라 하는데, ‘법에 대하여란 뜻입니다.

논을 허용했다는 것은 이 시대에 벌써 논장이 많이 나왔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논을 허용했으니 스승들이 다르마()에 대하여 글을 쓸 수는 있지만, 

모든 글이 다 논장이 되는 게 아니라, 참으로 인정할 만한 그런 것만 인정되고,

중요한 비중을 두고 대중들이 공부를 할 때 그것도 같이 공부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논장은 그 이후에 결집이 됐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아쇼카 왕은 전 인도를 무력으로 통일한 사람입니다.

특히 강국인 칼링가(Kalinga) 왕국과의 전쟁에서는 이십만 명을 죽였습니다.

비록 전쟁에서 승리는 했지만, 그 엄청난 죽음을 보면서 아쇼카 왕은 너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원래 힌두교도였는데, 신을 위해 무조건 희생을 시키는 그런 것에 대해서 환멸을 느끼고,

불살생계율을 가르치는 불법에 귀의를 하고 법을 전파하게 됩니다.

그리고 부처님을 너무 존경했기에 부처님의 자취가 있는 곳은 다 다니며 표시했습니다.

부처님이 태어난 자리에 큰 탑을 쌓고 석주를 세워 여기가 부처님이 태어난 곳이다라고 기록을 했습니다.

태어나신 곳만이 아니라 도를 이루신 곳, 설법하신 곳, 열반하신 곳 등 네 성지,

또 수자타 공양터, 수자타 집터, 춘다 공양터, 뼈무덤 사이의 수행터, 산꼭대기 명상터

부처님의 자취가 있는 곳에는 모두 다 탑을 세워 표시했습니다.

 

인도에서는 700년 정도 불교가 없어져 버렸기에 성지가 어딘지도 몰랐다가,

1896년 룸비니에서 아쇼카 석주가 발견되면서부터 성지를 확인할 수 있었고,

그 덕에 오늘 우리는 부처님의 경전과 맞춰보며 어디가 어딘지 찾아갈 수가 있는 겁니다.

 

또 그는 부처님의 법을 전 세계에 전파했습니다.

사신을 파견을 해서 버마, 스리랑카 저 멀리 그리스까지도 불교를 전파했습니다.

그때까지는 전파되었다고 해도 부처님 행적의 범위를 크게 못 벗어나다가,

아쇼카 왕에 의해서 불교는 인도의 중심사상이 되고 불교가 전 세계로 전파되었습니다.

 

지역적으로 엄청나게 넓어지고, 승려 수도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니까,

교단의 분열은 필연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불교와 일본불교가 같은 교단이 아니듯 지역에 따라서도 갈라지기도 하고,

지도자에 따라 갈라지기도 하고, 어느 경전을 중심으로 둘거냐 하는 데에 따라 갈라지기도 하고,

경전에 대한 해석차이로 갈라지기도 하면서 계속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20개의 부파 : 상좌부(10), 대중부(8), 근본 상좌부, 근본 대중부

이렇게 나뉘게 되니까 각 부파마다 서로 자기 것이 맞다고 주장하면서 많은 논장이 나오게 됩니다.

이 계율은 이렇게 해석해야 된다, 이 경전은 이렇게 해석해야 된다, 많은 경전 가운데 이게 특별히 더 좋다,

이런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각 부파마다 공부하고 연구하고 많은 글(논장)을 썼으며,

입문하면 부처님의 경전이나 율장을 가르치기보다, 자기 교파의 요지부터 먼저 가르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교공부가 경·율보다도 논을 중심으로 하게 되니 점점 공통점이 없어지고 차이점이 자꾸 많아지게 됩니다.

이렇게하여 불교는 근본적으로 상좌부와 대중부로 나뉘었다가,

상좌부에 열 개, 대중부에 여덟 개, 근본 상좌부, 근본 대중부 이렇게 20부파로 나눠지게 되었습니다.

 

근본불교 시대 : 논장이 출현하기 전까지

부파불교 시대 : 삶과 유리되어 철학적으로 복잡하게 진행, 소승불교

부처님 당시부터 논장이 출현하기 전까지, 즉 교단이 갈라지기 전까지를 근본불교라고 합니다.

그 다음 부파가 갈라지기 시작하면서는 논장이 출현하고, 논장을 중심에 놓고 불교가 진행되니까

좋게 말하면 불교사상이 풍부해졌지만, 나쁘게 말하면 비불교적인 요소가 끼어들 여지도 많아집니다.

초기 부처님의 가르침은 연기, 십이연기,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조금 더 보태면 오온 십이처설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후대로 내려가면서 학문적으로 정형화된 많은 불교교리가 나타나게 됩니다.

부처님은 대중에게 고통이 있을 때 어떻게 하라고 가르쳐서 해탈시켰는데,

후대에는 인간의 해탈과 관계없이 철학적·논리적으로 변했습니다.

좋게 말하면 사상이 풍부해지고 나쁘게 말하면 삶과 유리되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이 때를 부파불교(소승불교) 시대라 하고그 이전을 근본불교 시대라 말을 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이 강의는 '정토회 > 정토TV > 법문 보기 > 불교의 역사'에서  동영상으로 볼수 있습니다.

 

 

*** 짧은 생각 ***

 

그러니까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 혼자만의 작품이 아니라,

그 이후 수많은 스승들의 깨달음이 더해져 이렇게 발전한 것으로 이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