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2. 불교의 역사

[법륜스님의 '불교의 역사'] 제1강 경전의 결집 - 첫 번째

상원통사 2014. 8. 20. 21:08

오늘부터 8회에 걸쳐서 불교의 역사, 올바른 불교의 역사관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신도님들은 불교의 역사를 공부할 기회는 많지가 않은데,

이 공부를 통해서 2600년 불교의 살아있는 역사를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바는 존재의 실상인 연기법입니다.

이 연기의 도리라는 것은 시공을 초월하는 절대적 진리이기에, 장소와 시대가 다르다고 달라지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그분의 가르침은 당시 중생들의 고통에 대한 응답이었기에, 시대적·지역적인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서울 가는 길은 정해져 있지가 않다, 무유정법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깨달음입니다.

그러나 각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어디로 가면 서울로 갑니까?’ 하고 부처님께 질문을 했다면,

인천사람에게는 동이며, 수원사람에게는 북이며, 춘천사람에게는 서가 됩니다.

이렇게 동으로 가라, 북으로 가라, 서로 가라고 하는 것을 모아놓은 게 경전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인 그 경전은 방편설이기 때문에 역사적·사회적인 한계를 갖게 되는 겁니다.

인천사람들에게는 동이라고 하는 가르침이 있지만, 춘천사람에게는 동이 서울 가는 방향이 될 수 없습니다.

동이라고 하는 것은 지역적인 제약을 받아 인천사람에게만 해당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근기따라, 인연따라 설해진다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도 후세의 불교인들은 교리의 전승이나 유지에만 치중함으로써 이 방편을 목적화 시켰습니다.

깨달음의 길은 동이다’, ‘깨달음의 길은 북이다’, 이렇게 주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언어와 문자를 절대화시킴으로써 살아 숨 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죽은 언어로 만들어버렸습니다.

활구가 아니라 사구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렇게 진리를 추구해야 할 구도자가 형식주의자가 됨으로 해서, 

불교인이 비불교적이라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자 참다운 부처님 제자들이 형식화되고 죽어버린 불교를 다시 살아있는 불교로 되돌리려는 노력을 합니다.

예를 들어 의정부에 있는 사람들이 서울을 가려면 어디로 가느냐?’, 이렇게 물었을 때엔,

경전의 자구대로 해석한다면 동(수원사람)이나 서(춘천사람) 밖에 없지만,

이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치중하여 의정부 사람에게는 남으로 가라고 합니다.

이들은 기성교단으로부터 비불설, 부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다’, ‘비불교다’ 라고 비난과 탄압을 받았지만,

결국은 부처님의 정법 계승자로서 주체가 됩니다.

이렇게 불교는 시대와 지역을 달리하면서 변해온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접하고 있는 불교가 이런 역사적 과정을 거듭해오면서 변천되고 변화된 것이라면,

이 변화과정을 잘 관찰함으로써 오늘 불교가 갖는 모순들의 원인을 보다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주장이라고 다 옳지는 않습니다.

새로운 주장이 완전히 법에 어긋날 수도 있고, 또 부처님의 바른 법에 들 수도 있습니다,

과거의 주장이 부처님의 바른 법일 수도 있고, 부처님의 바른 법에서 어긋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전달된 불교는 이런 많은 변화를 거치면서 전달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면밀히 검토하고 유의하지 않으면 부처님의 바른 법에서 멀어지기가 쉽습니다.

옷을 몇 번 바꿔 입었기에, 처음의 모습이 어떤 것이었는지 우리가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불교 2600년 역사를 아주 객관적인 시각에서 관찰해 본다면,

불교의 흥망성쇠 이유와 각 경전이나 종파의 주의·주장이 상이한 이유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 한국불교가 안고 있는 문제의 근원이 무엇이며,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지

그 올바른 길을 우리가 찾아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세 가지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첫째, 부처님은 어떤 분이셨는가?

이것을 당시의 시대상황 안에서 가능하면 객관적으로 조명을 해보는 일입니다.

둘째,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어떤 것이었는가?

그리고 세 번째,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시대와 지역을 달리하면서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

 

이 세 가지를 우리가 잘 검토를 해보면, 본래 가르침은 이런 것이었지만,

이런 시대에는 이런 모습으로, 저런 지역에서는 저런 모습으로 바뀌었는데,

 어떤 것은 포장만 바뀌었지 알맹이는 똑같고, 어떤 것은 포장이 바뀌면서 알맹이도 바뀌었고,

 어떤 것은 포장은 그대로 있는 데, 알맹이가 바뀌어버렸다’, 이런 걸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시대 중생의 괴로움과 사회적 과제는 무엇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 처방이 될 수 있는가?

이 세 가지 공부를 통해서 원래 그 알맹이가 무엇이었는지를 찾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알맹이를 가지고, 오늘 우리시대 이 지역에서는 어떤 포장을 해야 될 것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아울러 오늘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병폐는 무엇이고 대중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이 시대 중생의 괴로움과 사회적인 과제는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새로운 포장·새로운 방편이 나오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붓다의 근본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삶속에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 속에서, 불교의 역사 속에서파악해야 하는 데,

이렇게 근본을 찾는 것은 근본으로 돌아가자, 참 신앙을 회복하자, 불자의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지,

옛날로 복귀하자는 그런 얘기는 아닙니다.

 

오늘 이 시대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새로운 방편으로 새로운 포장으로 사람들에게 선물하려면,

우리 시대가 처한 현실과 과제를 알아야 됩니다.

지구적인 과제는 무엇이고 인류적인 과제는 무엇이며, 이 민족과 사회의 과제는 무엇인지,

오늘 교화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과 고뇌는 무엇인지,

거기에 대해서 이 근원을 갖고 선물을 만들어서 나눠줘야 하는 겁니다.

즉, 우리가 가고자하는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고, 현재 사람들이 놓여있는 위치를 알아야,

동쪽으로 가야될지 서쪽으로 가야될지 아니면 새로운 길로 가야될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새로운 길은 형식이 다르거나 이름이 다르거나 문자가 다를 수는 있지만,

그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옛길과 같은 길일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세 번째, 불교의 역사 살펴보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자 많은 부처님의 제자들은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분은 너무나 위대했고, 많은 수행자들에게 의지처가 되어 주었기에,

그분은 영원히 이 세상에 있을 것 같았고, 그분께만 의지하면 될 것 같았고, 모르는 것은 물어보면 되었는데,

그분이 안 계신다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어도 심정적으로는 허전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의지하고, 누구를 생각해야 하며누구에게 물어야 하느냐, 이런 많은 혼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계실 때는 속박이 많았는데, 이제 우리 뜻대로 할 수 있으니 잘 됐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합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서 마하가섭(Mahākāśyapa) 존자

지금은 괜찮지만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 혼란이 오겠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부처님께서 한 곳에 앉으셔서 많은 사람에게 똑같이 법을 설하거나 글로 써서 주신 것도 아니고,

때에 따라 장소에 따라 인연 되는대로 사람들에게 그 때 그 때 법을 설했기 때문에,

부처님이 얼마나 말씀을 많이 하셨는지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그 요지는 알고 있지만,

그 수많은 방편들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게 다 같지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게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하라고 하셨다’,

이렇게 말하며 붓다가 가르치지 않은 것을 자기식대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집(結集) :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아서 정리함

왕사성 밖 칠엽굴에 깨달음을 얻은 장로(오백 아라한)들이 모였음.

그래서 마하가섭 존자는 모든 대중들에게 공고를 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아서 그것의 정리(결집)를 하겠다,

그러니 깨달음을 얻었다고 인증 받은 장로는 다 모여라’,

이렇게 오백 명의 교단 지도자들을 왕사성 밖 칠엽굴(동굴)로 모았습니다.

(절에서 모시는 500 나한은, 1결집에 참가한 500 제자들을 말하는 것임)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경전을 결집할 동안에는 아자타사투 왕이 공양을 모두 제공하였기에,

장로들은 다른 일에 신경쓰지 않고 오직 부처님의 말씀을 모으는 데에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경은 아난자 존자가, 율은 우팔리 존자가 초안을 내고 오백 장로들이 검증을 한다.

오백 명이 모이는데 어떻게 결집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인가?

누군가가 초안을 내고, 그 초안을 가지고 오백 명이 검증을 해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부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는 아난다 존자가 가장 많이 들었고 기억력도 좋기에,

경에 대한 초안자로는 아난다(Ananda) 존자 선정했고,

그리고 이건 하면 된다, 이건 하면 안된다 하는 율에 대해서는

부처님이 가르친 곧이곧대로 그대로 지킨 제자인 우팔리(Upāli) 존자를 선정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초안을 내서 발표를 하게 되면

대중이 듣고 있다가 그것은 옳다, 나도 그때 그 얘기를 들었다이렇게 동의를 하고,

만약에 틀렸으면 어느 부분은 나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것은 옳지가 않다’,

또는 빠졌으면 어느 부분은 그 때 이런 얘기도 같이 했는데 거기에 빠졌다’,

또 없는 게 덧붙여졌으면, ‘그 얘기는 다른 곳에서 하신 얘긴데 거기에 덧붙여진 것 같다’,

이렇게 수정을 하며, 깨달은 자 오백 명이 하나하나 검증을 했습니다.

 

불교 경전은 이렇게 해서 편집이 된 겁니다.

부처님 말씀을 들은 어느 한 제자가 자기 들은 대로 막 기록을 해서 남긴 게 아니고,

제자 중에서도 깨달았다고 하는, 아라한과를 증득한 오백 명이 초안을 하나하나 검토해서,

오백 명의 동의를 다 얻어야 만이 통과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은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제자도 아니고,

백여 년 후의 사람들이 전해 내려오는 얘기를 자기대로 듣고 편집한 것입니다.

누구하고 의논해서 공식적으로 편집한 것도 아니라, 네 사람이 각각 기록을 남긴 것이고,

그 네 개를 모아놓은 게 신약성서의 네 복음입니다.

이에 비하면 불경은 그 정확성이 거의 완벽에 가깝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제2강에 계속합니다~~)

 

 

이 강의는 '정토회 > 정토TV > 법문 보기 > 불교의 역사'에서  동영상으로 볼수 있습니다.

 

 

*** 짧은 생각 ***

 

부처님도 위대하지만, 그 말씀을 모으는 과정도 대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