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강에서 계속~~)
정토회에서의 수행
그럼 정토회에서는 어떻게 수행을 하느냐? 이것을 한 번 정리해보겠습니다.
맨 먼저 삼귀의로 시작합니다.
“부처님을 찬탄하고 공경합니다.
부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귀의합니다.
부처님 법 만난 것을 기뻐합니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나아가 나에게 돌아옴을 알아 부지런히 정진하겠습니다.
부처님 제자 됨이 자랑스럽습니다.
이 땅의 고통 받는 모든 중생을 구원하는 보살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삼귀의를 먼저 합니다.
‘내가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느냐’ 하는 것의 중심을 먼저 잡아야 됩니다.
그리고 수행한다고 할 때, ‘수행이 뭐냐’ 하는 원칙을 잡고 있어야 됩니다.
즉 ‘모든 것은 나로부터 나아가 나에게로 돌아옴을 알아 부지런히 정진하겠습니다’,
하는 것을 좀 더 자세하게 쓴 게 그 다음에 있는 수행문입니다.
“모든 괴로움과 얽매임은 잘 살펴보면 다 내 마음이 일으킨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 괴로움과 얽매임이 밖으로부터 오는 줄 착각하고,
이 종교 저 종교, 이 절 저 절,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다니며 행복과 자유를 구하지만 끝내 얻지 못한다.
그것은 ??에서 도는 밖으로 찾아서는 결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에서 일어나는 어떤 괴로움일지라도 안으로 살펴보면 그 모든 괴로움의 뿌리가 다 마음 가운데 있고
그 마음의 실체가 본래 공한 줄 알면 모든 괴로움은 저절로 사라진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이 일으킨 한 생각에 사로잡혀,
옳다 그르다 모양 짓고 그 모양에 집착해서 온갖 괴로움을 스스로 만든다.
한 생각 돌이켜서 이 사로잡힘에서 벗어나면 모든 괴로움과 얽매임은 즉시 사라진다.”
계정혜 삼학(戒定慧 三學)
매일 아침에 수행이 뭔지 원칙을 이렇게 딱 잡고 수행에 들어갑니다.
전통적인 불교수행법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을 계정혜 삼학(戒定慧 三學)이라 합니다.
계(戒律)라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의 원칙, 기준을 말하고
정(禪定)이라는 것은 바로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수행,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을 말하고,
혜(智慧)라는 것은 이 어리석음을 깨우쳐서 사물을 올바르게 보는 지혜를 말합니다.
계행을 청정히 한다는 것은 잘못을 뉘우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가 참회라는 말입니다.
참회라는 것은 '계행을 청정히 하는 것' 입니다.
“화나고 짜증나고 미워하고 원망하는 이 모든 것은
밖으로 살피면 상대가 잘못해서 생긴 괴로움인 것 같지만,
안으로 살피면 내가 옳다하는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일어난 것이므로
모든 법에는 원래 옳고 그름이 없음을 깨달아,
내가 옳다는 한 생각을 내려놓을 때
모든 괴로움은 사라지고 온갖 업장은 녹아나는 것이다.“
이렇게 원칙을 잡고, 그 다음에 일어나서 108배 절을 합니다.
그냥 생각없이 108배를 하면 이것은 다리 운동, 온몸운동 밖에 안됩니다.
108배 절을 하면서 각자 자기의 기도문, 즉 수행문에 집중해서 절을 해야 합니다.
수행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고 마음을 청정히 하는 것이기에, 각자의 수행문이 필요합니다.
‘우리 아들 잘 되게 해주십시오’, 이런 것은 수행문이 아닙니다.
인천사람은 동쪽으로 가고 수원사람은 북쪽으로 가듯이, 수행문은 각자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
서울가는 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근본으로 보면 다 똑같고 인연을 따라서 보면 다 다릅니다.
한 예로, 남편이 술 먹고 와서 행패부리는 것이 30년이 지나도 안 고쳐집니다.
잔소리를 해도 안 고쳐지고, 굿을 해도 안 고쳐지고, 절에 가서 100일 불공을 해도 안 고쳐지고,
영험하다는 곳에 100만원 보시하고, 매일 108배까지 했는데도 안고쳐지면 화만 더 나겠지요.
이런 분에게는 “부처님, 관세음보살님, 술은 우리 남편에게 보약입니다”,
이런 기도문이 주어질 수 있는데, 이 기도문대로 매일 절하며 기도합니다.
그렇게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그 30년간 헐떡거리던 괴로움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문을 받고 절하는 게 있고, 행동으로 하는 것도 있습니다.
‘매일 술상을 차려서 남편에게 퇴근하고 올 때 드릴 것,
많이 마시고 온 날은 해장국을 끓여 드릴 것’,
이게 계율이요, 해야 될 하나의 실천 프로그램입니다.
절을 할 때는 그렇게 하고, 많이 먹고 온 날은 해장국을 끓여드리고,
조금 적게 먹고 온 날은 부족한 부분만큼 차려 드리고, 안 먹고 온 날은 많이 드립니다.
왜 그럴까요? 보약이니까 빼먹으면 안됩니다.
이렇게 하면 남편은 미안하다고 생각하는게 아니라, “이게 미쳤나?” 하며 술상을 발로 차버립니다.
그러면 “이게 아무한테나 되는 건줄 아나, 저 인간은 원래 안되는거야”, 이러고 한 번하고 치워버립니다.
그러나 수행은 지속적으로 해야하는 것입니다.
발로 차면 이튿날 또 차려놓고 차면 또 차려놓고, 일단 한 번 법이 떨어지면 그냥 하는 겁니다.
되고 안되고를 논하면 안됩니다, 자전거를 타기로 했으면 넘어지든 말든 그냥 타는겁니다.
그렇게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우선 자기가 편안해지고 괴로움이 사라집니다.
남편이 먹는 술은 예전과 똑 같지만, 보약을 먹는 것이라 생각하니 술 갖고 시비할 일이 없습니다.,
시간이 더 지나면 남편의 술도 줄어듭니다.
그러나 이런 수행문을 받으면 의심하며 열 명 중에 여덟 명은 아예 안합니다.
‘왜 내가 이 짓을 해야 되냐, 스님도 결국은 남자편이네.’
실행하는 사람 둘 중 한 사람은 한 번만 발로 차버리면 끝납니다.
근데 그 중 한 사람은 끈기있게 합니다.
그렇게 하면 자기가 편안해지고 세월이 지나면 기적같이 남편 술이 줄어듭니다.
그때야 속으로 스님이 도사같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봉투에 돈도 가득 넣어가지고 옵니다. 여기 정토회의 보시는 다 그런 것입니다.
보살 : 아, 고맙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드디어 부처님 가피가 일어났습니다.
스님 : 무슨 일입니까?
보살 : 우리 남편이 술을 드디어 줄였습니다. (끊은 게 아니라 줄였다는 겁니다.)
스님 : 보살님 요즘 기도 안하시군요.
보살 : 스님 무슨 얘기요, 기도를 안 하다니요? 열심히 하고 있는 데...
스님 : 기도 안하구만요.
보살 : 스님이 108배 하라했지만 하루 300배씩 하고, 읽으라 안했어도 금강경을 한 번씩 독송하고 있습니다.
스님 : 보살님은 수행을 안 하시니까, 또 괴로움의 과보를 받을 겁니다.
보살 : (억울하여 속으로) 저 스님은 참 이상한 스님이야, 고맙다는 인사도 받을 줄 모르고 맨날 나무라기만 해!
근데 조금 있으면 다시 찾아와 하소연합니다,
‘스님, 해봐야 소용없네요. 도로아미타불입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남편 술이 줄어드는 걸 보고 드디어 영험이 왔다고 느낍니다.
이 말은 남의 변화를 통해서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자연히 ‘아, 기도 조금만 더하면 끊겠다’ 이런 생각이 들어, 100배 하던 걸 300배까지 합니다.
이 태도가 이미 수행에서는 완전히 어긋나 버린 것입니다.
그건 절해야 다리운동이지 수행이 아니고,
입으로는 ‘보약입니다’ 해도 마음속에는 술 끊었으면 하는 바램이 가득 차있기 때문에 그건 기복입니다.
그건 이미 욕망의 기도란 말입니다.
빨리 끊었으면 좋겠다 싶어 더 열심히 하는 데, 끊어지는 속도가 자기 생각만큼 안되겠지요.
그럼 또 짜증이 나기 시작하고, 짜증을 내니 남편 술이 도로 늘겠지요.
그러니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108배가 끝나면 그 다음에 자리에 앉아서 명상을 합니다.
계 그 다음이 정(禪定)이지요? 마음을 청정히 하는 수행을 하는 겁니다.
마음을 청정히 하는 수행, 마음을 고요히 하는 수행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수행에는 참선(參禪)이 있고, 염불(念佛)이 있고, 주력(?)이 있고 간경(看經)이 있습니다.
이건 대승불교에서 전해 내려오는 것이고, 남방불교에서는 비파사나(Vipasyana) 선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1,000일 동안 염불수행을 했었고, 이번 1,000일 동안은 비파사나 선을 합니다.
'비파사나'를 종교적인 냄새가 좀 덜 나게하려고, 용어만 ‘명상’으로 바꾸어 하고 있습니다.
* 비파사나(Vipasyana) : 관(觀)·능견(能見)·정견(正見)·관찰
-. 마음을 한 가지 대상에 집중하여 평화를 얻기보다는, 여러 현상들을 관조함으로써 통찰력을 얻는 수행법
-. 기존의 사마타 수행법으로는 궁극적인 경지에 오를 수 없다고 여긴 석가모니가 개발한 새로운 양식의 수행법
이렇게 명상을 10분이나 15분 정도 하고 그 다음에 경전을 읽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나눠진 책의 해당 날자를 펴면 거기에 부처님의 경구가 있습니다.
그것 세 번 읽는 것이 혜(智慧)입니다.
경전을 뜻을 이해한다는 것은 지혜를 닦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까지 가르친 것들을 정리한 걸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지금 우리 인류는 인간성 상실, 공동체 붕괴, 자연환경 파괴라고 하는 중대한 위기에 처해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불교의 근본 가르침 속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한다.
첫째, 연기법을 우리의 세계관으로 삼는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존재의 상호 연관성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네가 죽으면 나도 죽고 네가 살면 나도 산다, 네가 불행하면 나도 불행하고 네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다는
연기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함께 살고 함께 행복해지는 이 길을 추구한다.
여러 가지 꽃들이 모여 하나의 화단을 이루듯이 각자의 다양한 개성이 모여 조화와 균형을 이루게 하여,
시기와 질투를 뛰어넘어 사랑을, 대립과 경쟁을 뛰어넘어 화합을,
투쟁과 전쟁을 뛰어넘어 평화를 이루는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고자 한다.
둘째, 부처님과 보살을 우리 삶의 모범으로 삼는다.
평생을 가사 한 벌과 발우 한 개로 걸식하며 살아가신 부처님의 삶을 본받아
적게 먹고 적게 입고 적게 자며,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고 살아가는 구도자의 자세를 갖는다.
나아가 중생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고, 스스로 사바세계와 지옥 속으로 뛰어들어 중생을 구제하시는
대비 관세음보살님과 대원 지장보살님의 원력을 본받아, 일체 중생을 구원하는 대승보살이 되고자 한다.
셋째, 무아 무소유 무아집을 수행의 지표로 삼는다
정토세계를 이룩하기 위하여 나를 버리고 내 것을 버리고 내 고집을 버리고
오직 중생의 요구에 수순(?)하는 보살이 되고자 한다.
그리하여 한 생각 돌이켜 사로잡힘에서 벗어나, 괴로움도 없고 얽매임도 없는 대자유인이 되고자 한다.
나아가 인류에게 불어 닥친 이 위기를 극복하고 행복한 인생, 평화로운 사회, 아름다운 자연을 일구어
살기 좋은 정토세상을 만들고자 한다."
이렇게 새로운 각도에서 현대적 의미의 불법의 가르침 속에서 우리는 나아가고자 한다.
그러고 끝날 때 사홍서원을 합니다
“이 땅에 고통받는 중생이 한 사람도 없는 정토세계를 이루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괴로움과 번뇌가 일어나지 않도록 수행정진 하겠습니다.
부처님 법 만난 것을 기뻐하며 모두 배우겠습니다.
일체 중생과 더불어 꼭 수행하겠습니다.
성불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가 끝나면 보시하기 운동에 참여합니다.
집에 크리넥스통 같은 걸 마련해놓고 하루 1,000원씩 집어넣습니다.
이걸 100일마다 제출하고 새로운 교재를 받아서 또 정진하고 수행일지를 씁니다.
책이 나가면 거기다 자기 수행하면서 느낀 점 반성할 점을 쓰고 1,000원을 보시하고,
이렇게 아침에 다섯 시나 여섯시에 집에서 그냥 하면됩니다.
우리같이 절에 있는 사람은 절에서 하고, 집에 있는 사람은 집에서 하고,
여행가면 여관에서 하고, 교회 볼 일 있으면 교회에서 하면 되겠지요.
그러고 봉사활동을 합니다. 하루 한 가지 좋은 일....
이렇게 정해서 천일기도를 하니까, 여러분 중에도 동참할 수 있겠다 생각하시면 입재하시면 됩니다.
이것은 개인의 복을 구하기 위해서 모인 것이 아니기에 결사(結社)라 합니다.
이 일은 여기에 소속된 사람만 하는 게 아니고,
종교를 넘어서서 다른 종교, 일반 청년, 학생 이렇게 같이 해나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드린 것은 여러분들에게 동참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정토회에서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수행을 하는 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겁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이렇게 우리가 공부를 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 강의는 '정토회 > 정토TV > 법문 보기 > 실천적 불교사상'에서 동영상으로 볼수 있습니다.
*** 짧은 생각 ***
여기까지 첫 번째 강의 '실천적 불교사상 28강'이 모두 끝났습니다.
전혀 다릅니다.
그리고 재미있습니다
다음은 '불교의 역사' 강의를 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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