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까지는 ‘불교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은 이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서,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이 마지막 부분을 정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불교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의 가르침이다,
무엇을 깨닫느냐? 법의 실상을 깨닫는다,
깨닫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모든 괴로움이 사라지고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서, 완전한 행복 완전한 자유를 얻게 된다.
다른 가르침과의 차이가 어디 있느냐?
세상의 많은 가르침은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었을 때 느껴지는 만족감으로 행복을 삼고 있기에,
얻으려는 욕구를 따라 그것이 얻어지도록 기원을 하는 것이 대부분의 종교이거나 가르침이다.
즉, 소원성취를 목적으로 한다.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이뤄질 때 그것을 기적이라하고, 더더욱 거기에 매달리게 된다.
반면에 불교는 우리의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깨달음을 통해서 이루려고 한다.
우리가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즉 어리석기 때문에 괴로움과 속박이 생겨났다.
만약 이 어리석음과 무지를 벗어나게 되면 모든 괴로움과 속박이 사라져버리게 된다.
완전한 자유와 행복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바라는 바를 성취하는 길'을 걷는다면,
나에게 행복이 타인에게는 불행이 되고, 나의 승리가 타인에게는 패배를 가져오게 된다.
또 그 욕망은 새로운 욕망을 낳아서 욕망이 계속되기에 완전한 자유에 이를 수가 없다.
반대로 욕망을 악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무조건 억제하고 부정하는 쪽으로 나가게 되면,
이것은 고통을 참는 쪽으로 가는 길이며, 이 길 또한 완전한 자유와 행복에 이르지 못한다.
‘욕망을 따라갈 것이냐, 욕망을 억제하고 참을 것이냐’, 두 길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게 깨달음이 아니다.
깨달음이란 욕망의 본질을 꿰뚫어봄으로서 그 욕망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길을 찾는 것이 불교이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불교를 믿는다고 할 때에는,
어떻게 하면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 자유와 행복을 얻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거기에 도달할 것인가 이것이 분명해야 한다.
내 인생의 목표·목적이 완전한 자유, 완전한 행복이라고 하는 니르바나·해탈에 있다는 걸 분명히 해야 한다.
부처님의 인격을 닮아 가는 것 : 귀의불
그 경지에 도달한 분이 석가모니 부처님이셨고, 그러기에 우리는 그분을 찬탄하고 공경한다.
그리고 그분을 우리들이 나아가야 할 이상적 인격의 모델로 삼는다.
그분을 닮아가는 것이 바로 행복과 자유로 나아가는 길이다.
이것을 귀의불이다고 말하며,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밖이 아니라 안으로 향할 때 문제의 본질을 알게 된다 : 귀의법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러한 길로 나아갈 수 있느냐,
그것은 깨달은 이(부처)가 깨닫지 못한 사람(중생)을 위해서,
깨닫게 해주는 그 가르침(불법)을 따라가는 것이 가장 손쉽다.
그 가르침의 요지는, ‘행복은 밖으로 구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자기로 들어가 봐야 된다’
‘니가 그랬어’, ‘너 때문에 그랬어’, 이런 식으로 바깥을 향해있을 때는 절대 문제의 본질을 볼 수가 없다.
반대로, 돌이켜 안으로 향하게 되면 문제의 본질을 금방 알 수 있게 된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나아가 나에게로 돌아옴을 알아서 부지런히 정진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것이 거룩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한다는 의미다
귀의법이란, 좁게 말하면 그분의 가르침에 귀의한다는 뜻이고,
이치를 따져서 말한다면, 일체의 고압·속박이 다 우리들의 어리석은 마음으로 인해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눈을 안으로 돌려 그 어리석음을 꿰뚫어보게 되면, 그 어리석음이 사라지게 되고,
이때에 모든 괴로움과 속박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과 함께 수행 정진하는 것 : 귀의승
이러한 부처님을 모델로 삼고, 깨달음을 인생의 목적으로 하고,
깨닫기 위해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고, 안으로 향하는 살핌을 통해 해탈의 길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사람들은 참으로 나의 스승이며 나의 진정한 친구들이다.
이 사람들은 몸만 다르고 모양만 다르지, 나와 같은 사람들이다.
'나는 이 일원으로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이들과 함께 수행정진할거다' 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 귀의승이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그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해탈과 열반을 증득한 수많은 선지식들이 역사 속에 있었다.
역대 조사가 있었고. 수많은 아라한들이 있었고. 많은 큰 스님들이 계셨다.
이분들이 다 이 길을 증명해 주셨고, 지금도 이와 같이 나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런 분들에 대한 존경, 그 분들과 함께 간다는 자랑스러움, 이게 귀의승이다.
바로 이 삼보에 귀의함이 가장 중요하다.
이 삼보에 귀의하고 해탈의 길로 가려는 사람에게는, 다섯 가지 삶에 대한 원칙이 있어야 된다,
다섯 가지 삶의 원칙 : 오계
세상을 살아가는 갖가지 윤리 도덕 이런 것에 얽매이고, 자기 생각에 빠져서,
이게 옳으니 저게 옳으니, 이게 맞느니 저게 맞느니, 이렇게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놔야 된다.
모든 가치의 중심 : 생명존중사상
내려놓고 가장 중심에 잡아야 될 가치 기준이 뭐냐? 그것은 생명의 소중함이다,
모든 것들에 있어서 가장 으뜸 되는 것이 나의 생명이며, 또한 다른 사람의 생명이며 또한 모든 것들의 생명이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생명은 함부로 해쳐서는 안된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도 안되고, 타인을 살해해서도 안되고, 다른 생명을 함부로 해쳐서도 안되고,
설령 물이나 흙이나 공기라 하더라도 함부로 오염시키고 파괴해서는 안된다.
어리석은 눈으로 보면 '내가 있고 타인이 있고, 사람이 있고 다른 생물이 있고', 이렇게 되지만,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이 세계는 그물처럼 연관되어 있어서,
사실은 '그 사람들이 곧 나며, 그 생명들이 곧 나며, 이 우주 만유가 다 나와 한 몸'이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것을 분리할 수 가 없다.
그러기에 타인이나 다른 것들에 가해진 해침은 결국은 돌아서 나에게 고통으로 돌아오게 된다.
둘째는 우리가 살아가려면 무엇인가 생산을 하고 소비를 해야 된다, 즉 만들고 써야 된다.
근데 우리는 만들려고는 하지 않고 쓰려고만 하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이 다투게 되고, 사람이 자연을 파괴하게 된다.
얼마만큼 써야 되느냐, 필요한 만큼만 써야 된다.
무엇을 생산해야 되느냐, 필요한 것을 생산해야 된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이며 인간 공동체의 삶의 원리이다.
우리는 부지런히 일하여 중생의 은혜를 갚는 태도를 가져야 된다.
자신의 것일지라도 본래는 자기 것이 아님을 알아서, 필요로 하는 곳에 쓰일 수 있도록 열어두어야 된다.
내 자신이 중생에게 쓰임새가 되도록 하는 것이 봉사다.
내 존재의 의의는, 필요에 의해서 내가 기꺼이 쓰이도록 하는 것에 있다.
쓰임새가 있다는 것이 존재의 의의가 있는 것이고,
존재의 의의가 있다는 것이 삶의 보람이며, 삶의 보람이 잘 사는 길이다.
내가 가진 재화들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쓰이도록 하는 것이 보시다.
이것이 우리가 두 번째 지켜야 할 삶의 원칙이다.
모든 사람을 동등한 인격으로 존중하여야 한다.
자기 자신의 이해만을 중심으로하여, 타인을 쾌락의 도구로, 노동의 도구로, 전쟁의 도구로 본다는 것은,
상대방을 하나의 인격으로 보지 않고 그것을 물질화 시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나와 동등한 하나의 사람, 하나의 인격으로 존중해라.
피부색이나 민족·성별·종교가 다르다고, 가진 것이 없거나 천민이라는 이름으로 차별해서도 안된다.
이게 우리가 세 번째 지켜야 할 원칙이다
정보를 잘 유통되도록 함으로써 신의있는 인간관계를 형성해 나간다.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오래전부터 우리 인류가 쌓아온 많은 경험의 정보와,
함께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의 정보를 내가 받아들임으로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그 정보를 차단시키거나 왜곡시켜서는 안되며 잘 유통되도록 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사람과 사람사이에 믿음이 생겨나고,
그 믿음을 기초로 할 때 우리는 참다운 친구가 되고 참다운 사랑이 되고,
부모는 자식을 믿고 부모의 역할을 하고, 자식은 부모를 믿고 자식의 역할을 하고,
아내는 남편을 믿고 아내의 역할을 하고, 남편은 아내를 믿고 남편의 역할을 한다,
스승과 제자 간에도 그렇고,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에도 그렇다.
이런 신용이 있고 신의가 있는 인간관계를 만들어 나가야 된다.
이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네 번째 원칙이다.
중독성 문화를 버리고 늘 깨어있고 주체적이며 창조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다섯 번째,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언가를 먹고, 무언가를 입고, 무언가를 즐기기도 한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서는 습관성이 있는 게 있다.
습관성은 중독성이 되고, 중독성은 나를 그 물질이나 사상 또는 어떤 가치에 종속적인 존재로 전락시킨다.
바로 이러한 중독성이 있는 문화는 우리가 버려야 한다.
그런 물질의 섭취도 그만둬야 하고, 그런 어떤 종교, 그런 어떤 가치들도 버려야 한다.
여섯 가지 화합의 원칙
우리는 보다 자신이 더 깨어나고 더 주체적이 되고 더 창조적이 되는 그런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된다.
이 원칙을 지킬 때 우리가 목표로 했던 붓다의 길이 열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가는 길이 아주 손쉽고,
함께 가는 도반들 스승들과의 관계가 화합되고 청정해진다.
함께 가는 대중이 화합하고 청정하기 위해서는 여섯 가지 원칙을 지켜야 한다.
첫째, 같은 계율을 같이 지켜야 한다. 사회는 법치주의가 정착되어야 한다.
둘째, 의견은 서로 맞추어야 한다. 민주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셋째, 보시물은 균등하게 나누어야 한다. 경제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
넷째, 우리는 우리들이 갖고 있는 정보를 서로 공개되어야 한다. 투명해야한다.
다섯째, 말은 서로 자비롭게 해야 한다. 서로를 아끼는 마음과 이해 위에서 언어가 쓰여져야 한다.
여섯째, 자신과 의견이나 뜻이 다르더라도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서로 화합이 되고 그 공동체가 청정성을 유지할 수 있다.
많은 사람으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고, 고통받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의지처가 될 수가 있다.
아주 근원적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게 불교의 전부다 이렇게 말해도 됩니다.
이런 원칙에 여러분들이 동의를 한다면,
삼보에 귀의하기를 스스로 발심하고, 오계 지키기를 맹세해야 됩니다.
그러면 불자가 되는 것이고, 불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불교인이 된다는 말은, 벌써 이 정도 귀의가 되고 맹세가 된다는 것은,
법의 실상을 어느 정도 깨달았고, 자신의 삶의 허구를 어느 정도 봤고,
새로 가야할 길의 방향을 어느 정도 잡았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설령 이렇게 했다 하더라도 이 혼탁한 세상에서 나아가는 길이 일사천리로 가지지는 않습니다.
그럼 이럴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잘못된 것은 잘못된 줄 알아차려야 하고, 어긋났을 때 어긋남을 빨리 알아야 됩니다.
틀렸을 때 틀린 줄을 빨리 알아야 되고, 몰랐을 때 모른 줄을 알아야 됩니다.
잘못된 것이 잘못된 줄 알려면, 원칙을 쥐고 있어야 합니다.
길을 똑바로 가려는 사람만이 엇길로 갔다는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이지,
어느 길로 가야할 지 정해지지 않는 사람한테는 엇길이라는 게 없습니다.
자전거를 타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에게 ‘넘어졌구나’라는 게 있지, 그런 생각이 없으면 넘어질 일도 없습니다.
일단 자전거를 배우겠다고 마음먹었으면 넘어진다고 포기하면 안됩니다.
넘어지면 또 타고, 넘어지면 또 타다 보면, 어느 순간에 탈 수 있습니다.
열 번 스무 번 넘어진다는 것은 ‘이건 더 안 되구나’가 아니라, '지금 안 넘어지는 쪽으로 가고 있는 중' 입니다.
자전거를 배울 때, ‘몇 번 넘어지고 탔느냐’ 이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한 번 열 번 백 번이라는 숫자는 못 탔을 때 얘기고, 일단 타게 되면 넘어진 횟수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타려고 마음먹었으면 넘어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말고,
다만 넘어졌을 때는 다시 일어나야 됩니다.
뭔가 하다가 ‘이게 틀렸구나’ 하면 고치면 됩니다.
‘이거 잘못됐구나’ 하면 뉘우치면 되고, ‘이건 모르겠네’ 하면 물어서 알면 됩니다.
근데 우리는 모르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숨기려하고, 묻지 않고 안다고 하니까 자꾸 엇길로 갑니다.
아는 사람한테 물으면 금방 찾아갈 길을, 묻기 싫어 자꾸 돌아다니다 시간만 낭비합니다.
뭘 하다가 틀린 줄 알았다면, ‘바보같이 왜 이랬을까, 시간만 낭비했다’가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발견했으니 됐지, 아직도 발견 못했으면 잘못된 길로 더 갔을 것 아닙니까?
그러니 ‘틀렸구나’ 할 때는 과거에 대한 뉘우침도 있지만, 안 것에 대한 기쁨도 있는 것입니다.
틀린 줄 알았으니까 고칠 수 있는 기회가 온 겁니다.
이것 발견 못하고 그냥 갔으면 더 엄청난 문제가 생기겠지요.
우리는 공부를 욕심으로 합니다.
자전거를 타려고 했으면 ‘안 넘어져야 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안 넘어져야 된다고 생각한다 해서 안 넘어집니까? 그건 생각과 관계가 없는 겁니다.
‘안 넘어져야 된다’에 사로잡히면 넘어진 자기를 용서할 수가 없고 용납을 못합니다.
그러니까 넘어진 자기를 학대하고, 안된다고 포기하게 됩니다.
넘어질 수 있는 자기, 넘어지는 자신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합니다.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지 말고, 모르고 있다는 것을 오히려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는 척 한다고 알아지는 게 아닙니다.
틀릴 수 있는 자신을 인정하고,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랑해야 합니다.
잘못한 자기, 잘못 할 수도 있는 자신을 인정하고 수용하고 받아들이면, 여러분들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따라서 깨달음의 길, 즉 괴로움이 없고 자유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데는, 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해야 합니다.
이 때 착오를 범했다면 착오를 범한 줄 빨리 자각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자각하면, 조금이라도 더 괴로움이 적어지고,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갈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수행을 할 때 강박관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잘못한 자기, 못난 자기도 그냥 수용하면 됩니다.
나는 잘못을 안하는 사람, 매사에 완벽한 사람이라는 환상을 그리고 거기에 사로잡혀 있으니,
현실에 있는 자기, 틀릴 수도 있고 잘못할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는 자기를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이건 참회가 아니고 한쪽으로 또 기울어진 것입니다.
뉘우친다는 것은 잘못하거나 틀린 자기를 발견해서 그 전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잘못한 자기를 발견했으니 뉘우침의 눈물이 흐름과 동시에, 이제는 잘못을 안 범해도 되는 기쁨이 있습니다.
잘못을 발견하는 게 깨달음입니다.
잘못을 잘못인 줄 모르는 게 무지이며 전도몽상이고,
잘못을 잘못인 줄 아는 게 깨달음이며 지혜입니다.
그러니 잘못을 발견하는 것은 괴로운 것이 아니라 기쁜 것입니다.
(제27강에 계속합니다~~)
이 강의는 '정토회 > 정토TV > 법문 보기 > 실천적 불교사상'에서 동영상으로 볼수 있습니다.
*** 짧은 생각 ***
26강은 조금 딱딱한데, 1강 ~ 25강의 요약입니다.
'법륜스님의 법문 > 1. 실천적 불교사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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