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1. 실천적 불교사상

[법륜스님의 '실천적 불교사상'] 제27강 수행을 어떻게 할 것인가 - 두 번째

상원통사 2014. 8. 13. 22:00

(제 26강에서 계속~~)

 

참회(懺悔)란 무엇인가?

이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치는 것.

전에 지은 악업인 어리석고 교만하고 허황하고 시기질투한 죄를 뉘우쳐 다시는 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란 이 다음에 오기 쉬운 허물을 조심하여 그 죄를 미리 깨닫고 아주 끊어 다시는 짓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육조단경 참회편에 있습니다.

 

참회란 무엇인가?

()이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침이요, ()란 이 다음에 오기 쉬운 허물을 조심하여 짓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지은 것은 뉘우쳐서 소멸해버리고, 짓지 않는 것은 조심해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저는 잘못한 게 없어요. 내가 왜 참회를 합니까?’ 이렇게 말하는 데 그렇지 않습니다.

늘 부족한 줄 알고, 잘못한 줄 알고, 틀리는 자기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참회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은 죄의식하고 다른 것입니다.

내가 전생에 참 죄를 많이 지었으니 나는 죽일 년이야’, 이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 잘못을 깨달아서 뉘우치는 것을 참회라고 합니다.

 

참회에는 이렇게 스스로 잘못을 뉘우쳐서 깨닫는 것도 있지만,

공동체를 이루고 살 때 그 단체나 조직의 구성원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새벽 4시에 예불하고, 아침은 발우공양하고, 오전엔 정해진 구역을 청소하기로 약속했는데,

몸이 너무 아파 아침 예불도 빼먹고, 발우공양도 빼먹고, 청소도 빼먹었습니다.

본인은 일어날 힘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빼먹었다 생각하지만, 돌이켜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만약 옆에서 폭탄이 팡 터진다면, 아직도 십 리는 더 도망갈 힘이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몸이 아프다는 것에 사로잡혀 대중의 생활규칙을 어겼구나’, 이렇게 혼자 뉘우칩니다.

이 때 나 혼자서는 뉘우쳤다고 하지만, 같이 사는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열 번 잘못을 저지르고 열 번을 혼자서 뉘우쳤을지라도,

옆에서 볼 때는, ‘저 친구는 계속 청소도 안하고 아침에 일어나지도 않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의 머리를 아프게 하고 번뇌를 불러 일으키기에, 타인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니 대중이 있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제가 아침 예불을 빠지고, 아침 공양 참석 못하고, 청소도 못했습니다참회합니다

거기다가 조금 해명도 할 수 있습니다.

근데 사실은 몸이 많이 아파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앞으로는 몸조리도 잘 하겠습니다.’

이러면 다른 사람이 들으면서 , 아파서 빠졌구나하고 이해가 됩니다.

또 그런 설명을 안해도 저 사람이 자기 잘못을 알고 있구나’ 하고 머릿속에 있던 의심이 없어져 버립니다.

 

포살(布薩, uposadha) : 대중이 있는 데서 자기의 허물을 드러내서 참회하는 것

대중이 같이 살면서 정해진 규칙()에 근거를 둔 잘못에 대해서 대중 앞에서 말하는 것을 것을 포살이라 합니다.

엊저녁에 제가 여자생각하고 잤습니다’ 와 같이, 개인의 참회에 해당되는 허물은 포살하지 않습니다.

포살은 거기에 약속한 사람끼리 서로 하는 것입니다.

비구 250계로 포살할 때는, 비구계를 받은 스님들만 모여서 그 계율에 대해 자신이 어긴 것을 포살합니다.

신도님들은 그것에 대해 포살할 필요도 없고, 옆에서 구경할 필요도 없습니다.

 

대한불교 조계종에서는 '비구계를 받은 스님은 혼자 살아야 하고, 개인재산을 못 갖게' 되어있기에,

스님이 부인을 두거나 개인 재산을 가지고 있다면 이건 잘못된 것입니다.

이것때문에 잡아다가 구속시키고, 벌금을 매기고, 재산을 몰수하고, 감옥에 집어넣을 수는 없습니다.

왜 그럴까?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사회고 민주주의 사회입니다.

대한민국에 사는 국민은 누구나 다 사유 재산을 가질 수가 있고, 결혼을 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대한민국 법을 어긴 것이 아니기에, 국민으로서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로 약속하고 모인 조직 내에서는 잘못된 것이기에 징계를 하고 추방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스님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이지, 한 인간으로서 한 국민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근데 여러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81년 전두환 시절, 스님들이 여자를 숨겨놨거나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잡아다 취조하고 고문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스님이 저럴 수가 있느냐’, ‘정부가 잘하고 있네’, 저런 건 본 때를 보여야 돼싹 청소를 해야 불교가 바로 서!

이렇게 생각하시는 데, 이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법난'이라 하는 것은 그 스님들이 훌륭해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법으로 규제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경찰이 관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렇게 약속한 사람들 사이에 문제가 되는 것이지 법으로 규제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스님들이 서로 싸우며 돌맹이를 던지고 몽둥이로 때려 사람이 다쳐서 경찰이 잡아갔는데,

우리 종교내부의 문제로 싸우는 데 왜 경찰이 관여하냐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는 견해가 다르거나 이해관계가 다르다고 폭력으로 관철할 수 없도록 되어있으니까

그가 승려든 누구든 그것은 형사법으로 다스릴 수가 있습니다.

그건 종교에 대한 간섭이 아니고, 그냥 법 집행입니다.

우리는 관여해야 할 것과 관여해서는 안 될 것을 자꾸 헷갈리고 있습니다.

 

포살은 어떻게 하느냐?

예를 들어 한 집단이 이러이러한 계율(규칙)을 가지고 같이 살기로 약속했습니다.

살생하지 않는다, 도둑질하지 않는다, 사음하지 않는다, 거짓말하지 않는다, 술을 먹지 않는다’,

불자가 되었으니 이런 계율을 지키고 살기로 했으나, 인간인지라 살다보면 어길 수가 있습니다.

개인이 스스로 참회하는 것은 순간순간 매일매일 알아서 할 일이고,

단체에서는 보름마다 한 번 씩, 한 달마다 한 번씩 모여서 포살 법회를 엽니다.

 

포살법회는 어떻게 하느냐?

사회자가 일어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대중들이여 들으시라,

 오늘은 보름, 포살의 날이니 만약 대중들에게 지장이 없다면 승단은 포살을 베풀고 계본을 내리라.

 무엇을 승단의 첫 행사라고 하는가?

 여러 대덕이 몸의 청정함을 고백하니 나는 이제 계본을 읽으리라,

 대중은 여기에서 잘 듣고 잘 생각할 지어다.”

 

승가는 화합하고 청정해야 된다고 그랬지요?

승단이 유지해야 될 가장 중요한 것은 화합과 청정성이기 때문에 그 화합과 청정성을 유지해야 됩니다.

그런데 화합이 깨뜨려지고 청정성이 더럽혀졌다면, 뉘우쳐서 화합을 이루고 청정을 회복해야 됩니다.

이게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만약 스스로 허물이 있음을 자각한 사람은 드러내라.

 또 죄 없는 이는 잠자코 있을지니 잠잠하면 여러 대덕의 청정함을 알 리로다.

 만약 누가 물을 때는 마땅히 대답해야 하리니, 이같이 비구는 이 대중 속에서 세 번까지 질문을 받을 것이며,

 세 번 질문을 받고도 죄가 있으면서 고백하지 않는다면 고의적인 망어죄를 얻으리라.”

 

그러니까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스스로 고백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또 거짓말 죄까지 범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속이면서까지 굳이 여기에 살 이유는 없지않습니까? 이걸 잘 생각해야 됩니다.

여기는 그런 것을 벗어나서, 그런 세상을 벗어나서 살려고, 그런 것이 없는 세상을 이루려고 모였는데,

자기가 또 그런 것을 범할 바에야 밖에 가서 살지, 여기 있을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고의적인 망어는 도에 장애가 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나니,

 그러므로 죄 있는 것을 기억하는 비구로, 청정하기를 원하는 이는 그 죄를 드러내라,

 드러내면 그는 안락함을 얻으리라

 

, ‘참회하면 사라진다’, 이 말입니다.

이렇게 시작하면서 계본 하나하나를 구체적으로 질문합니다.

 

어떤 비구라도 만약 마을이나 숲에서 주지 않는 것을 취했다면, 그는 바라이에 해당하니 함께 있지 못하리라,

 이제 나는 여러 대덕들에게 묻노라, 이 점에 대해서 청정한가?”

대중이, 여러~~’ 이렇게 물을 때, 각각은 자기 개인에게 묻는 것처럼받아들여야 합니다.

, 자기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지난 보름동안 또는 한 달 동안 나는 이런 일이 있었던가? 없으면 침묵합니다.

바라이(pārājika) : 비구나 비구니가 승단을 떠나야 하는 무거운 죄. 음행·도둑질·살생·거짓말

 

다시 묻노라, 이 점에 대해서 청정한가?”

다시 살펴봐도 없으면, 침묵합니다.

 

세 번째 묻노라, 이 점에 대해서 청정한가?”

더 살펴봐도, 그런 일이 없으면 계속 침묵이 유지되겠지만, 발견되면 일어나서 고백합니다.

참회합니다. 저는 몇 월 며칠 몇 시에 어떠어떠한 상황에서 이러이러한 일을 범했습니다.”

그러나 계속 침묵이 유지되면,

여러 대덕은 이 점에 있어서 청정하십니다. 그러기에 침묵하시니 나는 그렇게 알겠소.”

 

그리고 또 한 계본, 한 계본 계속해 나갑니다.

이렇게 포살을 통해서 다 깨끗해진 후에야 청정한 입장에서 신도를 맞을 수가 있습니다.

이 날 신도들은 공양을 준비해서 스님들께 올리고,

스님들은 그 공양을 받아 먹은 후, 신도들을 위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설법하게 됩니다.

포살하지 않고 더럽혀진 상태로, 어떻게 남보고 깨끗이 하라고 얘기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정기적인 법회의 유래입니다.

 

자자(自恣, Pravarana) : 도반을 위해서 그의 잘못을 지적해 주는 것

그 다음에 또 다른 참회법이 있는 데, 이걸 자자(自恣)라고 합니다.

자자라는 것은 생활을 함께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됩니다.

같은 규칙을 갖고 있더라도, 멀리 떨어져서 있어 잘 모르는 사람하고 하는 게 아닙니다.

 

부처님 계실 때에는 우기동안 한 군데 모여 살았는데, 이를 우안거(雨安居)라 합니다.

우리나라는 겨울안거, 여름안거가 있지만 인도에는 우안거만 있습니다.

안거가 끝나는 날 둘러앉아서 서로가 서로의 잘못을 지적해주는데, 이것을 자자라 합니다.

 

이것은 잘못하면 비판이 될 수가 있기에 제대로 된 수행자가 아니면 좀 어렵습니다.

지금 우리는 포살은 할 수 있을지언정, 자자로 갈려면 공부를 더해야 합니다.

공부를 더해야 타인을 사랑으로 지적해줄 수 있고, 또 그것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자자는 비판을 넘어서서 상대를 도와주는 것이기에, 정말 고맙게 거울로 받아들여야 되는 데,

니는 뭐 잘하노, 니 차례 되면 두고 보자’, ‘니가 내내 고런 생각하고 있었구나’,

이렇게 오해를 하거나, 기분 나빠하고 억울해하고 분해한다면, 자자를 안해야 됩니다.

서로가 할 수준이 못되는 겁니다.

 

자자는 어떻게 하느냐?

대중들이여 들었으라, 오늘은 자자가 있는 날이오,

 만약 대중들에게 이의가 없다면 승단은 자자를 베풀어야 하오.”

대중이 좋습니다, 이의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해도 되고, 침묵하면 승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씩 일어나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승단에 대해 자자를 행하노니,

 나에 대해 무엇을 보고, 무엇인가 듣고, 또는 나에게 의심을 지으신 분이 있다면,

 대덕들이시여, 저를 가엾이 여기사 그것을 말씀해 주소서.

 죄를 알면 그것을 제어하오리다.”

 

이렇게 진지하게 청하고, 대중들은 자기가 본 대로 느낀 대로 얘기를 합니다.

자자를 할 때에도 반드시 계율에 근거해서 해야 합니다.

그냥 니는 평소에 좀 게으르더라’, 이런 것은 안 됩니다.

계율 어디어디에 근거하면 이렇게 하기로 되어있는 데,

 당신이 아무 날 아무 시에 이렇게 하는 것을 내가 봤는데 그것은 당신이 혹시 놓친 것 아닙니까?’

그럼 본인이 알아채고, ‘, 감사합니다. 그 때 제가 그걸 미처 생각을 못 했습니다.’

또는 그 때 저는 이러이러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이렇게 해명을 합니다.

이때 본 사람은, ‘제가 그건 잘못 봤군요라든지 아니면 아니요, 당신 그 때 그렇게 했습니다.’

이렇게 찾아나가야 되는 데, 잘못하면 분쟁이 생길 소지가 있습니다.

이때 꼭 필요한 것이 바로 무아집입니다, 끝까지 자기를 고집해서는 안됩니다.

설령 내가 잘못을 안했더라도 '다른 사람이 오해할만한 일을 한 것'만으로도 참회를 할 만하고,

그를 위해서 지적을 해주었는데 미처 못 알아들으면 끝내야지, 그걸 갖고 우길 이유 또한 없습니다.

이것이 자자입니다.

 

우리 정토회에서는 포살은 좀 더 넓게 행하지만, 자자는 이십여 명의 정토회 중심회원만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자자를 하고 나면 꼭 일 년에 한 두 명은 자자의 상처 때문에 탈퇴를 하든 지 중도포기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러니 자자라는 것은 대충하면 안되고, 아주 분명하게 수행적 원칙에서 해야 합니다.

 

스님도 올해 자자를 받아가지고 고쳐야 될 게 일곱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반말을 가끔 찍찍 잘한다, 건방지기 이를 데 없지요.

전화를 할 때 난데라든지, 아무 말도 안하고 누구 바꿔라이런 버릇이 있다는 겁니다.

올해 또 지적받은 것은, 몸이 늘 불편해 지압을 받았었는데,

사람들이 방문 열고 들어왔을 때 그걸 보는 게 별로 좋지 않다고 합니다.

내가 아픈 것만 생각하면 별 것 아니지만 남이 봤을 때는 그것 참 안 좋겠다.’

 

이런 지적을 받으면 그것들을 고쳐나가야 그 공동체가 화합을 이룰 수 있는 겁니다.

근데 이런 지적을 받고 아니, 요게 어디다 대고, 스님한테 고런 소리를 하고 있어!’,

이렇게 생각하면 같이 살기가 어렵습니다.

 

포살과 자자를 통해서, 즉 참회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들의 근본 목적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갑니다.

그러니까 참회는 중요한 수행입니다.

참회는 수행의 기초이고 기본이면서, 또 수행의 전부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제28강에 계속합니다~~)

 

이 강의는 '정토회 > 정토TV > 법문 보기 > 실천적 불교사상'에서  동영상으로 볼수 있습니다.

 

 

*** 짧은 생각 ***

 

참회, 포살, 자자...

무서워서 스님될 생각은 꿈에라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