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는 변하고 있었다.
10년 전과 5년 전이 다르고, 재작년이 작년과 다르더니,
올해는 또 작년과 달라졌고 내년은 올해와 다르게 변색되고 말 것이 눈에 훤히 비치고 있었다.
인간의 손때보다 더 더러운 것이 없다더니 저 더러운 손길이 닿을 적마다
옛 정취도, 자연의 생태계도, 인간의 마음씀도 송두리째 바뀌어버리고 있다."
1992년 3월 28일 남도를 답사하고 쓴 유흥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 남도답사 일번지』에 나온 문구입니다.
1995년 봄 즈음에 친척 결혼식이 있어 완도에 갔다가 올라오는 길에 들러본 다산초당,
그리고 20여년이 지난 오늘 보는 다산초당 언저리는 둔감한 내가 보기에도 너무 많이 변했습니다.
유흥준님이 다시 방문한다면 기가 차서 말도 못할것입니다.
다산초당을 팔아 어떻게든 돈 만들어보려고 그렇게 바꾸고 또 바꾸었겠지요.
<우리는 엄청나게 큰 '다산유물전시관' 앞의 엄청나게 큰 주차장에 차를 세웠는 데,
이 전시관 뒤에는 훨씬 더 엄청나게 큰 '다산수련원'이 있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좋은 점은 이곳에서 천주교 성지순례 확인도장을 찍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유물전시관에 왔으니 그냥 갈 수 없어 내부를 둘러보았는 데, 전혀 몰랐던 점 몇 가지!
-. "옛 선비들은 평생 편지와 함께 생활하였다.
편지 쓰는 일은 선비가 하는 일 중 가장 빈번한 일, 즉 편지란 '선비의 일상'이라 여겼던 것이다."
-. 다산도 편지가 일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열흘마다 집안에 쌓여 있는 편지를 점검하여 번잡스럽거나 남의 눈에 걸릴 만한 것이 있으면 하나하나 가려내어
심한 것은 불에 태우고, 덜한 것은 꼬아서 끈을 만들고, 그 다음 것은 찢어진 벽을 바르거나 책 표지를 만들었다.
~~ 편지 한 통을 쓸 때마다 두 번 세 번 읽어보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 중년(中年)에는 재앙이 두려워 점차 이 방법을 지켰는 데 아주 도움이 되었다."
-. 종두법을 최초로 소개한 사람은 지석영이 아니라 다산이었고, 그는 의사(醫師)이기도 했음.
-.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으로 경작하여 생산물을 노동일수에 의하여 공동으로 분배하자는 여전제(閭田制)를 주장함.
다산은 요즘같으면 좌빨 종북 중에도 골수분자로 몰려 다시 귀양가야할 것입니다.>
<이제 우린 800m 떨어진 다산초당으로 갑니다.>
<가는 길은 꽤나 정성들여 잘 가꾸고 있나 했는 데~~>
<웬걸, 깎아도 너무 많이 깎아버려 곧 무너져 내릴 곳도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오르막길을 한참 올라가야 하기에, 어르신네들은 이곳에서 쉬시고 우리만 올라갑니다.>
<다산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마을을 오가며 다녔던 오솔길>
다산 초당
"강진은 당대 최고의 실학자였던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이 무려 18년간 유배됐던 곳이다.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다산의 형제는 약현, 약전, 약종이 있는데
이들 4형제는 천주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첫째 약현의 부인이 이벽의 누이이며, 약현의 사위가 황사영이고 또한 이들 4형제의 누이가 이승훈의 부인이다.
125위 시복 시성 대상자 중 한 명으로 이미 성인이 된 정하상과 정정혜가 약종의 자식이다.
다산은 성호 이익의 학풍을 이어받아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된다.
1784년 수표교에 있는 이벽의 집에서 세례를 받았으나
1801년 신유박해로 정약용은 체포되었고 강진으로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된다.
18년간의 강진 유배에서 풀려난 후 자신의 배교를 크게 반성한 다산은 대재를 지키며
고신극기(苦身克己)의 생활을 하면서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묵상과 기도로 살아갔다.
그는 이런 참회와 기도의 생활 가운데 '조선복음전래사'를 저술했고
박해로 순교한 동지들의 유고를 '만천유고(蔓川遺稿)'라는 제목으로 정리하기도 했다.
특히 만천유고에는 이벽의 '천주공경가'와 '성교요지'와 같은 주옥같은 글들이 담겨 있다." - [한국천주교 성지순례]에서 -
초당(草堂)이란 '억새나 짚 따위로 지붕을 인 조그마한 집채'를 말하는 데 다산초당은 기와집이라는 게 이상하고,
귀양온 사람이 어떻게 이 높은 산꼭대기에 기와집을 지었는 지 이상하여 찾아보았더니,
-. 다산이 강진에 유배온 때는 1801년(40세) 겨울이며 처음 4년간은 강진읍 동문밖의 주막집에 기거
-. 해남 대흥사의 혜장선사(惠藏禪師)의 도움으로 1805년 강진읍 뒷산에 있는 보은산방에서 9개월간 기거
-. 1806년 고성암을 나와 그의 제자인 학래 이청(鶴來 李晴)의 집에 기거
-. 원래는 윤단(尹博)의 산정(山亭)이었던 이곳 다산초당으로 1808년 거처를 옮김
-. 이곳 윤씨들의 도움으로 유배생활의 어려움은 해소되었고, 유배중 윤서유의 아들 윤창모와 정약용의 외동딸이 혼인함
-. 1957년 해남 윤씨 후손들이 다산유적보존회를 조직하여 허물어진 초가를 치우고 다시 지으면서 기와로 복원
<안내판에는 '조만간 짚을 덮은 본래의 초당으로 복원될 예정'이라 적혀있는 데 언제라고는 안 적혀있습니다.>
다조(茶竈)
'다산이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있던 이 돌(靑石)은 차 달이는 부뚜막으로 쓰던 것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뒷담 밑 약천(藥泉)의 석간수(石澗水)를 떠다 솔방울로 숯불을 피워 찻물을 만들었다.'
동암(東庵)
"송풍루(松風樓)라고도 불리는 동암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여 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곳"
백련사 가는 오솔길
"유배생활동안 벗이자 스승이요 제자였던 혜장선사와 다산을 이어주는 통로"
천일각(天日閣)
"돌아가신 정조대왕과 흑산도에서 유배 중인 형님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이 언덕에 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스산한 마음을 달랬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1975년 강진군에서 새로 세웠다"
<강진군은 다산의 속마음까지 속속들이 읽을 줄 압니다.>
연지 석가산(蓮池 石假山)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산이다.
다산은 원래 있던 연못을 크게 넓히고 바닷가의 돌을 주워 조그마한 봉을 쌓아 석가산이라 하였다.
연못에는 잉어도 키웠는데,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제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잉어의 안부를 물을만큼 귀히 여겼다."
서암(西庵)
"서암은 윤종기 등 18인의 제자가 기거하던 곳이다.
차와 벗하며 밤늦도록 학문을 탐구한다는 뜻으로 다성각(茶星閣)이라고도 하며,
1808년에 지어져 잡초속에 흔적만 남아았던 것을 1975년 강진군에서 다시 세웠다."
정석(丁石)
"다산이 직접 새겼다고 전해지는 정석은 다산초당의 제1경이다.
아무런 수식도 없이 자신의 성인 정(丁)자만 따서 새겨 넣은 것으로,
다산의 군더더기 없는 성품을 그대로 보여준다."
천주교 성지순례를 다니는 길인데,
이곳 다산초당이 성지로 지정된 것이 조금은 의아합니다.
나중에 참회했었다고는 하나, 분명 살기 위해 배교했었고,
이곳 다산초당에서는 천주교와 관련된 그 무엇도 한 것이 없는 것 같은 데,
전남에는 성지가 별로 없어 끼워맞추기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전국 방방곡곡에, 전북에는 물론 심지어 제주도, 추자도에까지 많은 성지가 있는 데,
이곳 전라남도에는 모두 네 군데 중 실제 순교성지는 두 군데 입니다.
왜일까?
무척 궁금합니다. 공부거리가 또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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