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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 김영랑 생가

상원통사 2014. 7. 15. 21:04

아주 어렸을 적 할머니께 들은 이야기 하나,

'왜정시대 때 강진에 가면 유지 집안의 아들이 하나 있었는 데,

 서울가서 신식공부하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으니 하다못해 면서기라도 하면 좋을 것인데,

 방구석에 틀어박혀 종이에 끌적거리기만 해서 사람들이 '미친 놈'이라고 수근댔다더라.'

 

그러니까 그 미친 놈이 바로 영랑 김윤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이 영랑 생가 두 번째 방문입니다.

  2009년 1월에는 부모님 모시고 왔었고, 이번엔 장인 장모님 모시고 왔습니다.>

 

 

<예전보다 푸르름이 더해졌을 뿐, 변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영랑 생가(永郞生家)

"김영랑이 1903년에 태어나 1948년 9월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주하기 전까지 45년간 살았던 집이다.

 영랑이 서울로 이주하면서 생가는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다.

 197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지붕을 시멘트기와로 보수하였고, 기단부와 벽체는 시멘트로 발라 원형을 잃어버렸다.

 1985년 강진군청이 그 집을 다시 사들여 복원작업을 하였고 원래 초가집의 원형으로 다시 지었다.

 본채와 사랑채 2동만이 남아 있고 주변에는 모란밭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은 본채>

 

 

<멀리까지 왔으니 인증샷 한 컷 찍었는 데 ~~>

 

 

<똑같은 자리에서 5년 전 찍었던 또 다른 인증샷이 있습니다.

  그땐 정신은 약간 흐렸지만 아버지께서도 살아계셨었고,

  지금은 고등학생이 된 막내녀석이 초등학생이었었고...>

 

 

<집을 둘러보시다가 장모님께서 깜짝 놀라십니다.

  어쩌면 이렇게 장성 본가와 똑같이 생겼느냐고...>

 

 

<옆도 똑같고~~>

 

 

<뒤도 똑같고...

  전라도 지방 고유의 건축양식인 것 같습니다.>

 

 

<잉꼬 부부 인증 샷에~~>

 

 

<우리도 신혼여행 포즈 인증 샷! 쪼끔 부끄부끄~~~ ㅎㅎ>

 

 

<이곳은 사랑채.

  영랑은 주로 이곳에 머물며 작품활동을 하였다 합니다.>

 

 

 

 

영랑 김윤식(金允植)

1903년 1월 16일 이곳에서 5남매 중 맏이로 태어나 강진보통학교를 졸업

1917년 서울 휘문의숙에 진학, 3학년 때 3·1 운동이 일어나자 귀향

1919년 4월 4일 강진 장날에 만세운동을 일으키려다 발각되어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 동안 복역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 수학중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
1930년에 『시문학』지를 창간하고 「모란이 피기까지는」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등 시를 발표

1948년에 서울로 이사, 이듬해에 이승만 정권 밑에서 공보처 출판국장으로 7개월간 일함.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서울에 은신 중, 9·28 수복 때 포탄 파편을 맞고 서울 자택에서 47세의 일기로 타계

 

 

"‘북도에 소월이라면 남도에 영랑’이라는 말도 있듯이 영랑은 우리나라 순수시, 서정시의 대표적 시인으로 꼽힌다.

 193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순수’시의 대표주자였다는 말은 물론 ‘순수’한 찬사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매끄러운 운율과 세련된 시어로써 개척한 시 세계가 독보적이라는 점은 인정해야 될 것이다."

<그의 눈에 그의 마음에 들어오면,

  모란도~~>

 

 

<장광(장독대)도~~>

 

 

<새암(우물)도~~>

 

 

<돌담도, 햇발도, 동백도....

  모두 다 시가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없던게 보입니다.

  영랑 생가 올라가는 길 옆에 새로 들어선 시문학파 기념관>

 

 

 

<아직은 한가로운 내음이 묻어나는 전남 강진,

  큰 불편이 없다면, 바꾸는 것은 그만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우린 다산 초당으로 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