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1. 실천적 불교사상

[법륜스님의 '실천적 불교사상'] 제13강 삼귀의 - 네 번째

상원통사 2014. 6. 1. 21:19

(~~ 제12강에서 계속)

 

불삼신(佛三身) : 법신, 보신, 화신

법삼장(法三藏) : 경장, 율장, 논장

승삼승(僧三乘) :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

그냥 불 할 때는 법신 보신 화신을 삼신이라 합니다.

불에는 세가지 몸이 있다, 법신, 보신, 화신이 있다.

법에는 삼장이 있다, 경장, 율장, 논장, 이렇게 법에는 삼장이 있다.

승에는 삼승이 있다,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 이렇게 삼승이 있다.

 

성문승(聲聞乘) : 부처님의 법문을 직접 듣고 깨달은 자

연각승(緣覺乘) : 스스로 깨달은 자

보살승(菩薩乘) : 대승불교의 상가(승단)

부처님 살아계신 당시에 태어나, 부처님 법문을 듣고 그 자리에서 마음의 문이 열려서 성인이 된 사람을 성문승이라 합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살피고 원리를 관찰해, 법의 실상이 공한 줄을 깨쳐서 해탈하는 사람들을 연각승이라 합니다.

테라밧다(소승불교)에는 성문승과 연각승만 있지만,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승이라 해서 그 상가를 별도로 구성을 합니다.

성문·연각승은 다 스님들이 중심이 되어 있는 데, 이 보살(bodhi-sattva, 보타의 준말)들은 스님들이 아니라도 됩니다.

* 보살 : 깨달음을 구하면서 중생을 교화하는 수행으로 미래에 성불(成佛)할 자.

          자신도 깨달음을 구하고 남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행하는 자.

 

그럼 보살승은 어떤 사람들이냐, 보살승은 수행방법이 조금 다릅니다.

오늘은 남자 분들이 많으니까, 남자를 중심으로 얘기를 한 번 해보겠습니다.

몇 십 년 전에 어떤 거사님이 재벌회사의 상무인데, 어느 날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당신 부인이 낮에 장바구니 들고 카바레 가서 놀다가 잡혀 지금 경찰서에 있으니 와서 데려가라는 겁니다.

이런 전화를 받으면 얼마나 화가 나겠어요?

나는 새벽부터 나와 힘들게 일해 돈벌어다 주는 데, 춤바람 나서 카바레나 다닌다 생각하면 화가 이루 말할 수가 없겠지요.

 

이렇게 화가 엄청나게 났을 때 연각승은 어떻게 수행할까요?

화가 딱 났다, ‘왜 화가 났느냐’ 하고 먼저 화를 살핍니다.

살펴보면 마누라가 잘못했고 내가 잘해서 화가 났습니다.

그럼 마누라가 왜 잘못했을까?

이렇게 자기 마음을 살피고 화에 휩싸여 있던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하나하나 관저에 들어가보면,

그 맨 아래쪽에 가서 화날 아무런 이유가 없는 빈자리를 보게 되면, 화가 싹 없어집니다.

이렇게 수행하는 것을 연각수행이라 합니다.

 

화가 났을 때는 ‘이걸 어떻게 해야하나? 패버릴까, 이혼해야하나?’ 이런 마음이지만,

마음이 편안해지면 평상심을 가지고 경찰서에 가서 부인을 데려올 수도 있습니다.

자기가 깨닫지 못하고 화가 나서 씩씩거리고 갔을 때는, 가자마자 싸우고 두들겨 패고 이럴 확률이 높지만,

먼저 깨닫고 나서 마음이 편안해지면 부인을 도울 수가 있습니다.

‘자기를 먼저 정화를 하고나서, 그 다음에 남을 구제한다’ 이게 성문들의 수행법, 성문·연각의 수행법입니다.

 

보살 수행법은 조금 다릅니다.

경찰서에서 전화를 딱 받는 순간 부인의 입장으로 돌아갑니다.

부인도 직장생활하려 했지만 내가 집에 있으라 해서 지금까지 집에만 있었고,

애 키우고 살림하고 정신없이 살다보니 세상 물정도 잘 몰라 바보같이 돼버렸고,

아이들은 학교로, 남편은 회사로 가버리고, 자기 혼자 빈집에 앉아 있으니 공허합니다.

그래서 남편 붙잡고 ‘얘기 좀 하자’ 하면 ‘바쁘다, 돈 주었으면 됐지 무슨 소리냐’ 하고,

결국은 친구와 차 한 잔 마시다가, 찜질방 가다가, 영화보러 가다가, 카바레에 춤추러 가게 되었습니다.

뭔가 공허하고 허전한 마음을 남편하고 같이 나누려고 대화를 시도해보면,

‘바쁘다, 피곤하다, 쓸데없는 소리 한다, 집에서 할 일 없으니까 괜히 번뇌나 많다’ 그렇게 외면해 왔다 이겁니다.

‘얼마나 마음이 공허하고 답답했으면 내 부인이 거기까지 가게 되었을까’, 이 생각을 하게 되면 화가 안 납니다.

그 사람의 아픈 심정이 그냥 가슴에 콱 박혀오면 화가 하나도 안 납니다.

 

이런 남편은 '아내가 캬바레 갔다, 경찰에 잡혀있다'는 얘기를 듣고서도 마음이 괴롭지가 않습니다.

부인의 아픈 마음으로 돌아가니까 본인에게 아무런 화도 안 일어나서 괴롭지 않은 겁니다.

이런 수행법을 보살수행법이라 합니다.

중생의 아픔을 껴안으면 자신의 괴로움이 없어집니다.

내가 깨달아서 중생을 교화한다든지, 한쪽은 중생교화하고 한 쪽은 깨닫는다든지, 그 마음을 깊이 관하고 이런 것도 아니고,

일체 중생의 고뇌와 아픔을 비심(悲心)으로 안음으로 해서 자기의 고뇌가 사라져버리는 수행이 보살수행입니다.

이렇게 해서 깨달음의 길로 가는 수행을 보살수행이라 합니다.

 

테라밧다(소승불교)에는 성문승과 연각승만 있고, 다 스님들이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근데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승이라 해서 보살로 승단을 구성합니다.

보살이란 ‘깨달은 자’, ‘이치를 깨달은 자’입니다.

스님이든 재가신자든 상관없이, 이치를 깨달아서 정진하는 사람끼리 모아서 승단을 구성하는 겁니다.

보살 중에는 출가한 남자스님도 있고 출가한 여자스님도 있고, 재가 남자신도도 있고 재가 여자신도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반대로 출가한 스님 중에도 보살이 못되는 사람도 있을 거고, 재가신도중에도 보살이 못된 사람이 있겠지요.

 

테라밧다에서 볼 때는 대승불교의 상가 구성원에 재가자도 끼어 있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비불설이다, 이건 불교도 아니다’라고 합니다.

반면 대승 불교에서는,

‘우리는 깨달음의 길로 가는 데 나만이 아니라 여럿이 같이 간다.

 나만 해탈의 길로 가는 게 아니라 동시에 마누라까지 같이 가는 것이고,

 내가 해탈한 뒤에 부인의 어려움을 구해주는 게 아니라 나와 부인이 동시에 간다.

 이러한 수행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대승(大乘, 큰 수레)이고,

 당신들은 공부해서 혼자밖에 못 가므로 소승(小乘, 작은 수레)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대승불교이지만 승가구성은 소승식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대승불교는 사부대중으로 승가를 구성하므로 신도도 거기에 넣자’ 이러는 데 이것도 맞지 않습니다.

대승에서는 깨달은 자, 보살로 상가(승단)를 구성합니다.

보살이 될 자격은 누구나 다 가지고는 있지만, 깨닫지 못하면 승가의 구성원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일반 신도도 절에 등록만하면 다 승가의 일원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옳지 않고, 깨달아야 상가의 구성원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한 번 정리해보겠습니다.

소승불교(테라밧다)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만 불보로 보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직접 설했다고 하는 사암(?) 12부 경전만 법보로 보고,

10대 제자, 500대 제자, 1200대 제자들만 승보로 본다.

 

대승불교에서는

모든 부처님을 불보로 보고,

팔만대장경을 다 법보로 보고,

성문 연가 보살 조사까지 다 승보로 본다.

 

더 크게 나아가,

깨달은 사람은 다 부처이니 '예수님도 깨달았다면 부처다'라고 정의하면, 부처님이 이 세상에 한량없이 많겠지요.

그리고 그걸 뭐라고 하든, 이름이 뭐라고 붙어있던, 깨달은 자의 가르침은 다 법보다,

그가 종교를 믿건 안 믿건, 어떤 종교에 있던 관계없이,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자들은 다 승보다,

이렇게 정의하면 다른 모든 종교도 불교가 포용해 낼 수 있습니다.

 

깨달은 자는 다 부처님이요, 깨달음을 향해서 나아가는 자는 다 부처님의 제자요, 깨닫게 해주는 가르침은 다 법이다,

이렇게 크게 규정하면 깨달음의 길을 추구하는 것은, 민족과 인종, 종교·모양·형식을 넘어서서 다 불교라는 울타리에 넣을 수 있고,

조금 좁혀 대승적으로 규정을 하면, 소승이든 대승이든 밀교든 종파든 할 것 없이 다 불교라고 할 수 있고,

테라밧다식으로 더 좁히면, 테라밧다 불교만 불교의 근본이고 다른 것은 다 엉터리다 이렇게 되겠지요

그러니까 어떻게 규정을 지을거냐에 따라서,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는 안목이 서로 조금씩 다릅니다.

 

제가 이 세 가지를 다 설명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는 여러 색깔의 불교가 있음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스리랑카에 간다면 ‘이 분들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서 이야기를 하니 대화가 잘 되겠지요.

또는 목사님이나 신부님이 오시면 ‘스님과 다른 모양의 옷을 입고,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마음을 내야 합니다.

이렇게 큰 테두리를 가지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삼귀의(三歸依)는 '불(佛)·법(法)·승(僧)의 삼보(三寶)에 몸과 마음을 바쳐 믿고 의지한다'는 뜻으로,

귀의불(歸依佛)·귀의법(歸依法)·귀의승(歸依僧)을 말합니다.

 

귀의불(歸依佛) :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내 인생 최후의 목적은 돈 버는 것, 권력 잡는 것이 아니고 깨닫는 것이다' 라고 마음가짐을 가질 때,

부처님께 귀의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귀의법(歸依法) :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깨닫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가겠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마음을 가질 때

바로 법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귀의승(歸依僧) : 여러 도반들(공동체)과 함께 나아가자.

혼자 가는 것보다는 여러 도반들과 같이 가는 게 좋습니다.

내가 모르면 그들이 가르쳐주고 또 내가 알면 그들을 가르쳐 주면서 같이 가는 게 좋습니다.

 

아난존자가 부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난존자 : 부처님, 좋은 벗은 수행의 반은 되겠지요?

부처님   : 아난아, 좋은 벗은 수행의 전부다.

‘깨달음의 길로 가는 사람들’은 ‘깨달음의 길을 목표로 가는 사람들’과 도반을 해야 도움이 되는 것이지,

복 얻으러 다니는 사람, 재물 얻으려 하는 사람들과 같이 섞여 다니다 보면 금방 물들어서,

본래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그것이 마치 불법(佛法)인 양, 그것이 깨달음인 양 기도하다가,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야, 너 착하다. 너 깨달았다’ 이러면 진짜 깨달은 줄 아는 데, 그건 다 환상입니다.

목적이 분명해지면 공부가 금방 되는 데 엉터리 사람들하고 같이 어울려 다니다 보면 자꾸 헷갈립니다.

좋은 벗(도반)을 만난다는 것은 수행의 전부입니다, 도반은 경쟁의 상대가 아닙니다.

늘 같이하는 도반과 더불어 서로 지적해주고 물어보고 반성하고 이렇게 가는 게 수행하는 데 제일 좋은 것입니다.

 

 

 

이 강의는 '정토회 > 정토TV > 법문 보기 > 실천적 불교사상'에서  동영상으로 볼수 있습니다.

 

 

*** 짧은 생각 ***

 

 '예수님도 깨달았면 부처다'에 한 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