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1. 실천적 불교사상

[법륜스님의 '실천적 불교사상'] 제10강 삼귀의 - 첫 번째

상원통사 2014. 5. 18. 21:00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 괴로움이 없고 자유로운 경지에 이르려고 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가장 중요시해야 하는가?

이 세상의 모든 단체나 조직, 철학, 사상에서는 각각 나름대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라면 자신이 최상의 행복에 이르는 것을 천당에 가는 것이라고 할 때,

거기에 갈 수 있는 길은 창조주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 예수 그리스도에 의지하고 교회에 의지하는 것,

또 신부님이나 목사님에 의지해서 그곳에 이를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가장 소중하게 여깁니다.

마르크스 사상 같으면 마르크스 사상 나름대로 소중하게 여기는 게 있겠지요.

불교도 인간이 찾아낸 방법들이니까, 그런 단체들과 비슷한 요인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불교는 자유와 행복을 어떻게 추구하느냐

불교에서는 자기 밖의 어떤 대상에게 빌거나 얻어서 자유와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자기 마음을 깨우쳐서, 안온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입장에서 공부를 해나갑니다.

이런 사람들이 공부를 해나가는 데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느냐?

바로 삼보입니다

 

삼보(三寶) : 깨달은 이(佛), 깨달은 자의 가르침(法),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이(僧)

세상의 무엇보다도 가장 소중한 보배라는 뜻의 이 삼보에는,

첫째, 깨달은 이가 있어야 하고,

둘째, 깨달은 이가 깨닫지 못한 자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펴야하는, 깨달은 자의 가르침이 있어야 하고,

셋째, 그 가르침을 듣고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어야 합니다.

  

세 가지 보배(三寶) : 붓다(佛, Buddha), 다르마(法, Dharma), 상가(僧, saṁgha)

깨달은 이 붓다, 깨달은 이의 가르침 다르마,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들 상가.

이것을 인도의 원래 말로는 '붓다, 다르마, 상가'라고 말하고,

한문으로는 '불, 법, 승'이라고 말하고,

일반적인 용어로는 '깨달은 이, 깨달은 이의 가르침, 깨달은 이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불교에서 중요시 하는 것은 절대자나 신(神)이 아니고 물질이나 사상, 이념도 아닙니다.

이 세 가지 보배를 가장 중요시 합니다.

 

오늘은 이 불법승 삼보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불교인들이 이렇게 모여서 행사를 하는 건 무엇 때문입니까?

깨닫기 위해서, 깨달음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행사를 합니다.

건물을 짓는 것도, 문화공연을 하는 것도, 다 깨달음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행사를 하든지 시작할 때엔 맨 먼저 삼귀 의례를 합니다.

세 가지 보배에 내가 돌아가 의지하는 마음을 먼저 내는 겁니다.

 

삼귀의(三歸依) : 삼보(三寶)에 귀의한다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이것은 깨달은 이를 가장 존경하고, 나도 깨달은 이가 되겠다는 원을 세우고,

나도 반드시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 하는 말입니다.

 

두 번째는 어떻게 깨닫느냐?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절에 안다녀도 이론상으로는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스승이 없는 데 깨달았으니까 누구나 다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분은 처음에 혼자서 그 깨달음의 길을 갔기 때문에 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했습니다.

그분이 깨달음의 길에 도달한 뒤에 돌아봤더니 그렇게 많이 헤맬 필요가 없더라,

그래서 거기에 갈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을 가르쳐 주셨고, 바로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 가장 쉽고 빠르다,

그러니까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그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여기모인 우리 모두는 다 그 깨달음의 길로 가는 친구들이다.

 

이것을 서로 확인하는 작업이 삼귀의입니다.

그래서 어떤 행사든지 시작할 때 삼귀의를 하는 겁니다.

지금은 의식이 되고 문화가 되고 일종의 요식행위가 되었지만, 원래는 그랬습니다.

 

삼보란 '불, 법, 승'을 말하고,

팔리어(pāli語, 소승불교경전의 언어)로는 '붓다, 다르마, 상가'라고 말하고,

우리말로는 '부처님, 부처님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는 여러 종류의 불교가 있습니다.

원래는 하나였지만 이천육백여년의 시간이 흐르고, 서로 다른 문화권에 전파 되다보니까, 불교(불교의 문화)가 조금씩 변했습니다.

예를 들면, 불·법·승의 개념규정에 있어서,

크게는 부처님, 부처님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 이렇게 차이가 없는 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 할 때 이 사람들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는 불교마다 조금씩 다르다는 겁니다.

 

소승불교(근본불교, 남방불교, 테라바다, theravāda)

스리랑카, 버마, 방글라데시, 타이, 캄보디아 이런 쪽에 있는 불교를 지역적으로 따져서 남방불교라 합니다.

문화적으로는 남방불교가 이천육백여년 전 부처님께서 가르치셨던 그 불교의 원형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스리랑카 사람이든, 버마 사람이든, 타이 사람이든, 다 당시의 인도 언어인 팔리어를 배워서 경전을 읽습니다.

나라는 달라도 경전은 다 똑같고 발음도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금방 통합니다.

옷도 조금씩 색깔이 다르기는 하지마는 어쨌든 황색이고, 하나짜리 입고,

지금도 이 사람들은 절에서 밥을 해먹지 않고 탁발을 해서 먹고, 하루에 한 끼만 먹고,

나름대로는 굉장히 그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부심이 굉장하고, ‘우리가 진짜 불교’라는 의식이 강합니다.

스스로 자기들의 불교를 테라바다(theravāda, ‘근본’이라는 뜻)라고 합니다.

이사람들이 볼 때는 근본불교가 ‘진짜배기’이고, 북방불교는 ‘가짜배기’에 속합니다,

 

근데 북방에 있으면서 대승불교라고 지칭되는 사람들은 이 사람들을 보고 뭐라고 그러냐,

지역적으로는 남쪽에 있다고 남방불교, 또 대승불교에 대해서는 소승불교라고 부릅니다.

(승(乘) : 사람을 이끌어 이상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불교의 가르침을, 물건을 싣고 운반하는 수레에 비유한 말)

 

근본불교에서의 붓다(Buddha, 부처, 佛) 

근본불교에서의 삼보에 대한 정의는 대승불교와 약간 다릅니다.

근본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만 붓다(깨달은 이)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수행해서 깨달을 수는 있지만, 깨달았다고 해서 ‘붓다’라 칭하지는 않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혼자서 깨달았기 때문에 특별히 높여서 붓다라고 부르고,

다른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았기 때문에 제자라는 의미로 아라한이라 부릅니다.

사실은 ‘아라한’도 부처님의 열 가지 이름 중의 하나입니다.

 

그들이 쓰는 붓다는 우리가 쓰는 붓다라는 개념과 조금 다릅니다.

부처다 불이다 할 때는 석가모니 부처님만 말합니다.

이천육백 년 전에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이 깨달음의 길을 우리들에게 처음 열어주신 그분만 부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후에 수많은 사람이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그분들은 부처님이라고 하지않고 아라한이라고 부릅니다.

 

근본불교에서의 다르마(Dharma, 달마, 법, 진리)

다르마(달마)는 법 또는 진리라고 말하는 데, 진리는 이 세상에 수도 없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제자들(재가신도 포함)이 질문을 했을 때, 그 괴로움을 없앨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말씀하셨는데,

그걸 그대로 모아서 기록해 놓은 것을 수트라, 또는 경이라 하는 데 근본불교에는 이것만을 다르마로 인정합니다.

팔만대장경 안의 여러 경 중 ‘아함(āgama)경’만 여기에 해당합니다.

근본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 다르마, 법 이렇게 규정합니다.

 

근본불교에서의 상가(saṁgha, 僧)

근본불교에서의 승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옷 모양도 그 분처럼 하고, 그 분의 가르침을 다 읽고 외우고, 그 분의 가르침을 따라 길을 가고,

그 분이 행했던 행을 그대로 따라하는 사람들만 승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재가신자인 불자들은 그냥 불자일 뿐 승은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음의 눈이 열렸다면, 이미 이 세상의 모든 집착을 버리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고 가사입고 길을 떠나버린단 말이에요.

이렇게 머리 기르고 세속에 남아있다는 것은 아직도 집착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이들은 승의 대열에 넣지 않습니다.

재가신자들은 엄격하게 말하면 깨달음의 길로 가는 사람들을 후원하는 사람, 또는 집단으로 보는 겁니다.

 

 

(제11강에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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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생각 ***

 

이번 강의는 별 의문없는 쉬운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