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쾌락의 길과 고행의 길이 그것입니다.
쾌락의 길(세속의 길)
쾌락의 길이란 세속의 길, 곧 우리 모두가 가는 길입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애쓰는 것은 수행자만이 아니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입고 싶을 때 입고, 오가고 싶을 때 오가는 것,
즉, 하고 싶은 것을 해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서 생기는 만족감, 그 만족감으로 행복을 삼습니다.
뭔가 하고 싶을 때 그것을 했거나, 뭔가 얻고 싶은 데 그것이 얻어졌을 때의 만족감을 우리는 행복이라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자신의 행복을 끝없이 추구해갑니다.
그런데, 하고 싶은 것을 해서 행복을 얻어야 되는 데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결혼하고 싶은 데 마음에 맞는 남자가 없다, 아기를 원하는 데 안 생긴다, 집 사고 싶은 데 돈이 없다,
그러니까 자기가 원하는 대로, 뜻하는 대로 안되면 힘들고 괴롭다고 느낍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이 뜻대로 안되면 불행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그 반작용으로 우리들에게는 늘 불행이 오고 있습니다.
30여년 쯤 전에는, 애들 고등학교라도 졸업시켰으면, 논을 몇 마지기만 샀으면, 양식이나 넉넉했으면, 이런 것들을 원했습니다.
그 때는 이것만 있으면 나한테 무슨 걱정이 있으랴 했지만, 요즘은 이런 것들이 대부분 다 갖춰졌습니다.
그러니까 옛사람들이 볼 때 오늘 우리들의 삶은 괴로움이 거의 없는 삶입니다.
특히 여자들은 새벽에 일어나 나무 때서 밥해 식구들 먹이고, 들판에 가서 하루 종일 일하고, 저녁에 또 밥하고,
추운 겨울에 냇가에 가서 빨래하고, 밤이면 길쌈하고, 그러면서 애도 7~8 명씩 낳아서 키우고...
이런 것 생각하면 요즘 아파트에서 애기 한 둘 낳아 키우는 건 일도 아닌 데,
요즘 젊은 분에게는 이게 얼마나 어렵고, 불평불만이 많고 인생살이가 힘든 것인지...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만족하고 행복해 지기에 그 길을 찾아가는 데,
문제는 그 욕구가, 그 욕망이 자꾸자꾸 커지고 멈추지 않는다는 겁니다.
두 번째는 그 욕망이 양적으로 커질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 자꾸 바뀝니다.
옛날에는 밥이라도 좀 먹었으면 좋겠다, 그러다가 쌀밥 먹었으면, 소고기국에 먹었으면, 국이 아니라 스테이크로 먹었으면,
또 그냥 고기도 아니고 안심으로 먹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자꾸자꾸 바뀌고 끝이 안 납니다.
따라서 행복을 추구하는 길에는 늘 욕구불만이 뒤따라옵니다.
즉, 행복을 추구해 가면서 늘 불행을 맛보는 게 오늘 우리들의 삶입니다.
여러분들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갖가지 노력을 하지만, 그 노력이 여러분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뒤따라옵니다.
이런 식으로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지만, 도리어 자유와 행복이 자꾸 줄어드는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술이 먹고 싶어 먹습니다. 조금 취하면 더 먹고 싶어 더 먹고, 또 먹고 싶어 또 먹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먹고 싶어서 술을 먹었지만, 취하면 술이 술을 잡아당깁니다. 이렇게 해서 중독이 됩니다.
중독이 되면서부터는 건강을 해치고 노동의 질을 떨어뜨리고, 기분을 더 나쁘게 만듭니다.
양만 늘어나는 게 아니라 질도 높아집니다.
막걸리에서 소주로, 소주에서 맥주로, 맥주에서 양주로 이렇게 또 질이 높아집니다.
애써서 번 돈이 거기 탕진되고,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결국은 술귀신이 됩니다.
처음에는 내가 술을 먹는 데, 중독이 되면 술이 주인이 되고 사람이 종이 되어 술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한 잔 먹고 와서 ‘저거 두들겨 패버려!’ 하면 술이 시키는 대로 마누라를 패기도 하고, 애를 패기도 하고...
이렇게 술의 종이 됩니다. 주객이 전도되고 자아를 상실하는 겁니다.
술에 사로잡히면, ‘술이 없으면 괴롭다!’ 이렇게 됩니다.
밥 먹을 때도 술이 없으면 못 먹고, 친구 집에 가서도 술 한 잔 대접 안 받으면 섭섭하고,
친구가 찾아왔을 때도 술 한 병 안 들고 오면 섭섭합니다.
기분 좋으려 마시기 시작했는 데, 중독이 되면 술 없이는 살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겐 술보다 더한 중독이 있습니다. 뭘 까요? 바로 돈 중독입니다.
아내나 남편에게든 애인에게든 선물을 주면, 고맙다는 말보다 먼저 ‘얼마 줬어?’ 이렇게 물어봅니다.
‘이거 얼마짜리야?’, 이 말은 주는 사람의 사랑과 정성을 화폐가치로 환산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거기에 꽉 중독이 되어있습니다.
옛날에는 양반이네 상놈이네 하는 이런 데 더 높은 가치를 두었습니다.
상놈이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안 쳐주었습니다.
부인이 술집해서 돈 벌었다 하면 안 쳐주었는데, 요즘은 뭘 해서 벌었든 그런 것 안 따집니다.
‘한 달에 얼마 버는 데?’ 이게 가장 중요한 겁니다.
이게 절에까지 들어왔습니다.
‘스님, 어떻게 요새 잘됩니까?’ ‘뭐가요?’
‘절이 잘 되느냐구요.’ ‘아아, 예에.’
절이 잘되느냐 할 때 어떻게 해야 잘되는 겁니까?
첫째는 신도수가 많은가, 둘째는 보시금이 많은가, 이 두 가지입니다.
장사 잘 되냐 하는 것이나 똑 같습니다. 장사가 잘되는 것은 손님이 많은가, 이익이 많은가 이겁니다.
이러한 법회를 통해서 경제적으로 손실이 날수도 있고 사람이 한두 명밖에 못 올 수도 있지만,
죽으려고 했던 사람이 부처님의 법에 의해서 살아나고, 헤어지려는 사람이 헤어지지 않고, 마음에 고통을 겪는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난다,
이런 것을 가지고 그 절이 있을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이렇게 평가되어야 되는 데 그렇게 평가가 안 됩니다.
잘되는 기준은 이미 상업적입니다.
병원 잘 되냐 할 때도 환자가 많은가, 알짜배기가 많은가 이겁니다.
절에서도 돈 있는 굵직굵직한 신도가 알짜배기 신도입니다.
일반 회사든, 장사든, 병원이든, 심지어 종교단체까지도 평가가 이렇게 됩니다.
돈이 최우선입니다. 거기 중독이 되니까 이게 너무 자연스럽게 들리는 겁니다.
옛날 같으면 이게 자연스럽게 들릴 수가 없습니다.
근데 알게 모르게 우리 모두가 돈에 중독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게 아무렇지도 않게 들리고,
그에 따라서 대답도 하고 맞장구를 치고 이러는 겁니다.
요즘은 스님도 돈이 없으면 괴롭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돈이 없어도 안 괴로웠습니다.
‘나는 돈 없으면 괴롭다’ 하면, 나는 이미 나도 모르게 돈에 중독이 되어있는 겁니다.
술 먹는 사람이 술이 없으면 괴롭고, 아편에 중독된 사람이 아편 없으면 괴롭듯이...
그럼 여러분들이 무엇에 중독이 되어있는 지 이제 알 수 있겠죠?
화장품 없으면 괴로운 사람은 화장품에 중독되어 있고, 담배 없으면 괴로운 사람은 담배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쭉 살펴보면 ‘나는 특별히 중독된 게 없는 데’ 라고 생각할 지 몰라도, 벌써 중독이 된 게 굉장히 많습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려 하는 길이 도리어 괴로움을 만들고 있는 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길은, ‘완전하게 해결되는 길이 아닐 뿐만 아니라 거꾸로 된 길이다’ 해서 전도몽상이라 말합니다.
부처님도 스물아홉 살까지 이런 방식으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물론 ‘이 길로는 완전하게 행복을 얻을 수 없다’, 이런 의심은 사춘기 때 했지만 다른 길이 없었고,
다른 길로 가려 했지만 부모님이 반대했기 때문에 그냥 그 길만 간 겁니다.
사람들은 다 회의하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결혼생활을 회의하면서, 사업하면서 회의하면서, 자식 낳고 회의하면서, 돈 벌면서도 회의하면서,
다른 길이 없으니까 스스로 회의하면서도 자식한테 똑같은 길을 가르치고, 선생도 제자에게 똑같은 길을 가르치는 겁니다.
고행주의 : 욕망의 억제를 통해 행복과 자유를 얻고자 함
그런데 여기에 반대를 하고 나선 길이 하나 있습니다.
이 욕망이라는 것은 끝이 없는 거다, 이건 마치 불과 같으니 애초에 생길 때 억눌러버려야 된다,
욕망은 마귀고 사탄이고 마왕이다, 이렇게 규정짓고 욕망을 무조건 억제하는 쪽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세수하고 목욕하고 빨래하고 머리 자르는 것들도 욕망으로 여겨 행하지 않고,
부드러운 음식을 먹는 것도 혓바닥의 욕망을 따라가는 것이라 보고, 나무열매나 풀뿌리 같은 거친 음식만 먹고,
앉을 자리에 가시가 있는 지 돌맹이가 있는 지 둘러보는 것마저도 몸을 편하게 하는 욕망을 따라가는 것으로 여깁니다.
이러한 욕망으로부터 벗어나야, ‘완전한 행복과 자유를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
이것을 쾌락주의에 반대해서 고행주의라 합니다.
이 길을 통해서도 행복을 좀 맛볼 수가 있습니다.
쾌락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었으나, 고행의 길을 걸어서 어느 정도의 자유와 행복을 맛볼 수가 있기에,
완전한 자유와 행복을 찾아서, 그 고행을 끝없이 계속해 나갑니다.
그런데 이 욕구라는 것은 따라가면 점점점점 커지는 특성이 있습니다.
또 어떤 욕구는 한 번 충족시키면 더 이상 안 일어나는 것도 있습니다.
어떤 욕구는 그것을 억누르면 그냥 없어져 버리는 것도 있고,
어떤 욕구는 그걸 억누르기 때문에 더욱더 커지는 것도 있습니다.
한 번 해버리면 끝날 것을 억눌러 놓으니까 자꾸 커지는 게 있습니다.
배고프면 먹으면 끝입니다. 배고픔을 억누르면 해결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졸리는 것도 계속 자면 잠이 떨어질 것 같은 데 아무리 자도 잠이 자꾸자꾸 늡니다.
반대로 아예 안자면 잠은 안 올 것 같지만, 그렇게 해도 그게 안 끊어집니다.
담배같은 것은 처음부터 안 피운 사람은 중독이 안 되는 데, 피웠기 때문에 중독이 되는 겁니다.
담배에 중독된 사람이 끊으려 할 때 피우고 싶은 욕망이 더욱더 커지는 것은, 억누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화도 탁 내버리면 숫제 간단하게 잊을 수도 있는 데, 거꾸로 가슴속에 넣어 억누르니 확대 재생산됩니다.
화를 참아보니까 어떻습니까? 괴롭지요.
갖가지 욕망을 참는 것은 괴롭습니다. 그것을 쫒아가도 괴롭고, 억눌러도 괴롭습니다.
부처님도 고행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이 세상사람 중에는 아마 최고로 많은 고행을 하셨을 겁니다.
또 세속에 있었을 때는 이 세상사람 중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욕구 충족의 길을 향해 갔었습니다.
이 양쪽 끝을 다 가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통해서는 ‘완전한 자유와 행복을 얻을 수 없다’ 하는 것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스물아홉 살 때까지 간 길이 우리와 같은 쾌락의 길, 욕구 충족의 길이었고,
그 후로 6년 동안은 바로 금지의 길, 억제의 길, 고행의 길이었습니다.
뼛골만 앙상한 그런 죽음직전 상태까지 갔었으나, 부처님께서는 그걸 통해서도 해탈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처님은 이 두 가지를 다 버리시고, 제3의 길을 갔습니다.
부처님은 이 고행과 쾌락의 두 길을 다 버리고 제3의 길을 갔는데,
그것을 이름하여 중도(中道)다 이렇게 말합니다.
(중도(madhyamā pratipad) : 극단적인 견해나 실천을 벗어나는 불교철학의 기본적 입장)
(제8강에 계속합니다~~)
이 강의는 '정토회 > 정토TV > 법문 보기 > 실천적 불교사상'에서 동영상으로 볼수 있습니다.
*** 짧은 생각 ***
술!!
난 언제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을까?
대학생이면 술마시고 담배 태우는 게 당연하고 멋진 것으로 여겨, 토해가면서 배웠고,
기왕 마시려면 취할 때까지 마시자하여, 술마시는 것은 곧 취하는 것이 되었고,
다음 날을 생각하지 않고 마셔대니, 마시면 숫제 필름이 끊어지는 게 일상이 되었다.
끊으려 여러 번 시도도 해보았지만 말짱 도로묵, 이젠 아예 시도조차도 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끊을 수 있는 지 이제 이론적으로는 안다.
술을 먹고 싶은 생각이 나면 참거나 외면하는 게 아니라,
'아, 내가 지금 술을 먹고 싶구나'하고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 술로부터 자유로워지 시작하는 것인 데,
아는 것과 실천에 옮기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종교와 철학이 다른 점은 실천(수행)의 차이라 했다.
술을 화두로 삼아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다면, 벌써 반은 깨달은 것이 되리라.
마음은 부처의 길로 가고 싶은 데,
몸은 세속에서 떠나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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