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1. 실천적 불교사상

[법륜스님의 '실천적 불교사상'] 제6강 불교는 우리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가? - 세 번째

상원통사 2014. 4. 14. 22:22

(~~ 제5강에서 계속)

 

자 그런데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하나씩 살펴봅시다.

정말 내 생각이 옳은 가?

정말 내 것이라는 게 있는 가?

정말의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괴로움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찾다가 근본으로 돌아온 게 '아 아소 아집'입니다.

이게 우리들의 의식을 일으키는 모든 것들의 밑바닥에 딱 깔려있습니다.

이것으로 나를 삼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옳은가?

과연 내 생각이 옳은가?

사람은 누구나 다 의견이나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생각도 일어나고 느낌도 일어나지만, 그것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다르다는 말 속에는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의식중에 ‘같아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부부니까 '생각이 같아야 한다, 견해가 같아야 한다.' 이럽니다.

남일 때는 '다를 수도 있지' 이렇게 쉽게 생각하는 데,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너하고 나하고는 같아야 한다'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같을 수 없는 데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갈등이 생깁니다.

 

사람마다의 생각은 왜 다를까요?

살아온 환경이 다르니까, 각자의 업식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각자의 안경 빛깔이 다르기 때문에 조금씩 조금씩 다 달리 보이는 겁니다.

조금씩 조금씩 다르다는 것은 누구하고는 조금 비슷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하고는 전혀 다를 수도 있습니다.

노랑과 주황이 비슷하고, 빨강과 파랑이 다르듯이...

 

내거다, 내 것이다.

여러분들 저 태양은 누구 겁니까? 내 것이 아닙니다.

공기도 빗물도 땅도 다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런 내 것 아닌 것들이 모여서 나무가 되고 풀이 되었으니 나무와 풀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내 것 아닌 풀들을 먹고 자란 것들도 마찬가지로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갖고 있으니 내 것이라 하겠지만 엄밀히 분석을 해보면 내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해가지고는 귀에 안 들어오겠지만, 내 것이라 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태양은 내 것이 아니니까 누가 햇볕을 쪼여도 여러분들은 시비 안합니다.

물도 공기도 흙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만물은 필요에 의해서 쓰이는 겁니다.

근데 다 내 것이라고 착각을 하죠. 내 것이면 왜 죽을 때 못 가져갑니까?

 

나다.

우리 선사들의 이야기 중에 이런 게 있죠?

해탈의 길을, 불법의 진리를 묻고자 산 넘고 물 건너 수만리 길을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스승이 계시는 절에 당도하여 스승님을 불렀습니다.

‘스승님!’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법륜이가 왔습니다.’       ‘이름이 왔어?’

‘몸뚱이가 왔습니다.’       ‘시신을 메고 왔어?’

‘생각이 왔습니다.’          ‘귀신이 왔어?’

여기서 꽉 막혀 대답을 못하다가, 잠시 뒤(7년이 지난 뒤),

‘스승님, 한 물건이라 해도 옳지 않습니까?’

그렇게 문답은 끝났습니다.

 

이렇게 자꾸 ‘내가 누구냐’하고 들어가보면, 이제까지 ‘나’라고 생각했던 것도 ‘나’라고 할 만한 게 없습니다.

그렇다면 정말의 ‘나’라는 것은 뭡니까?

이렇게 우리는 딱 정신을 차리고 그 근원을 살펴봐야 됩니다.

 

진리는 정해져 있지 않다.

방안에서 부처님이 신도들과 대화를 하고 우리는 문밖에서 듣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묻습니다. ‘부처님, 저는 저희 집에서 서울을 가려면 어디로 가야합니까?’

부처님이 ‘으로 가거라!’ 이렇게 대답합니다.

옆 사람도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

문밖에 있던 내가 머리를 탁 굴려, ‘저거 물을 거 뭐있어, 동으로 가면 되지.’

그런데 부처님은 ‘너는 으로 가거라.’ 이렇게 대답합니다.

다른 사람이 또 묻습니다. 그래 내가 또 통박을 굴려, ‘동, 북, 그러면 이번에는 서겠구나’

근데 부처님이 ‘으로 가거라.’ 이럽니다.

헤깔리지요? 또다른 사람에게는 쪽으로 가거라 하고, 그 다음은 으로, 그 다음은 으로 가라 합니다.

밖에서 듣는 내겐 복잡하고 어렵고 헤깔립니다.

근데 정말 그럴까요?

첫 번째 물은 사람은 인천사람이었어요. 동쪽 맞죠?

두 번째는 수원사람, 세 번째는 인천사람, 네 번째는 춘천사람, 다섯 번째는 인천사람, 여섯 번째는 수원사람이 물었던 겁니다.

여러분들도 서울이 어디에 있는 지, 묻는 사람이 어디에 사는 지만 알면 대답할 수 있는 쉬운 문제입니다.

 

만 명이 물어도 대답해 줄 수 있습니다.

만 명이 같을 수도 있고 만 명이 다 다를 수도 있습니다.

대답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서울가는 길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정해져 있지 않다’ 이것을 금강경에서 무유정법(無有定法)이라 그럽니다.

( 무유정법 : 법(진리)은 정해져있지 않다 )

그래서 노자님께서는 ‘도는 도라 하면 이미 도가 아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유정법, ‘진리는 것은 정해져 있지 않다’ 하니까, ‘아, 그거 없다는 뜻이네요.’ 이럽니다.

서울가는 길은 있지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걸 없다 이렇게 해석한 것은 한쪽으로 치우친 잘못된 망념입니다.

 

서울가는 길은 동북서남 막 부르고, 서울가는 길은 정해져 있지 않다 하니까,

‘서울가는 길은 아무렇게나 가면 된다, 아무 방향이나 가면 되는구나.’ 이럽니다.

아무 방향이나 가면 안 됩니다, 이 말도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렇게나 가면 된다', 또는 '없다' 이런 식으로 멋대로 생각을 하니까,

불법이 어렵고 까다로운 겁니다.

서울가는 길은 정해져 있지가 않지만, 자신의 위치만 정해지면 저절로 서울가는 방향은 정해집니다.

무유정법으로 인해서 갖가지 방편(方便)이 나오는 겁니다, 팔만 사천가지 방편이 나옵니다.

( 방편 :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해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가르침 )

 

방편을 진리로 착각 

여기서의 부처님 말씀은 방편으로 이해해야 하는 데, 

팔만대장경을 분석하니까, 동쪽으로 가라는 게 세 경이 나오고, 북쪽이 두 경, 서쪽이 한 경이 나온다,

그러니까 다수로 따져서 '동쪽이 진리다!', 이게 테라밧다(소승불교)가 주장하는 겁니다.

 

동쪽으로 가라는 게 세 번이나 나오는 거는 쉬운 일이니 유치원생 이야기이고,

북쪽으로 가라는 게 두 번 나오는 거는 중학교 과정이고,

서쪽으로 가라는 게 딱 한 번 밖에 안 나오는 게 이건 대학원 과정이다.

이게 화엄경, 이게 최고다! 아니다 법화경, 이게 최고다!

 

그런데 만약에 의정부사람이 와서 ‘서울 가려면 어디로 갑니까?’ 하고 물으면

‘아마도 동쪽일 걸, 경전에 보니까 동쪽이 많던데...’

‘아니야, 진짜 서울 빨리 가는 길은 서쪽이야.’

그러나 경전에 없더라도 ‘너는 남쪽이다!’ 이런 줄 알아야 불법을 제대로 아는 겁니다.

그런데 또 어떻게 주장하느냐?

‘본래 정해져 있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 표시가 없는 이게 진짜!’라고 합니다.

즉, 남쪽이 진짜라는 겁니다. 이래서 또 종파를 하나 만듭니다.

 

길에는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습니다.

쉽고 어려운 것은 그가 받아들이는 데 따라다니는 겁니다.

높고 낮음도 없습니다. 불법에 어찌 높고 낮음이 있겠습니까?

부처님 법이 어떤 게 높고 어떤 게 낮은지 안다는 것은, 자기가 부처님보다 높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생각을 버리고 부처님 법을 받아들여야 깨달을 수가 있는 데,

자기 생각을 가지고 부처님 교리를 해석해서,

이거는 높고 이거는 낮고, 이거는 초등학교 과정이고 이거는 대학교 과정이고...

이게 바로 망상입니다, 망상! 

여러분들은 그 망상의 종파주의에 빠져있으니까 불법을 통달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느 한 경전을 읽더라도,

‘이 사람이 어떤 처지에서, 어떤 마음에서, 어떤 입장에서 질문을 했을까?’

‘부처님이 이렇게 대답하신 것은, 이게 무슨 의미일까?’ 이렇게 해야 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두 세 케이스만 경전을 읽으면, ‘아, 이런 말씀이구나’, 이렇게 탁 통합니다.

그렇게 공부하여 나머지 케이스에 적용해보면 다 맞습니다.

그래야 다르마(진리)를 체득했다고 하는 겁니다.

 

‘동이 몇 가지고, 서가 몇 가지고, 북이 몇 가지고, 남은 없다’, 이렇게 해서 박사학위 논문은 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현실에 있는 사람이 와서 질문했을 때 자기 인생에 대해서는 한마디 대답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린 지금 박사학위 논문 쓰려고 여기 온 게 아니란 말입니다.

 

교리적인 정리 

자 그럼 오늘 공부한 걸 한번 살펴보고 교리적으로 정리해 봅시다.

'근본 가르침은 무아, 무소유, 무아집이다', 이런 말 들어보셨어요?

 

우리들의 고뇌의 뿌리가 아, 아소, 아집에 있는 데,

‘본래 아라고 할 것이 없음’을 깨닫는 것을,

소승불교(원시불교)에서는 ‘무아’다 이렇게 말하고, 대승불교에서는 ‘’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의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정해져 있지 않지만, 형편에서 보면 아주 간단하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쪽도 저쪽도 집착하지 말고 탁 놔버리면 바로 갑니다. 이것이 ‘중도’입니다.

그 중도에 여덟 가지 길이 있다 해서 ‘팔정도’라고 합니다.

그것을 금강경에서는 ‘무유정법’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또 대승에서는 이 길도 다른 말로 ‘공’이다 이럽니다.

‘공’은 ‘없다’는 말이 아니고, ‘아무렇게나 하면 된다’는 말도 아닙니다.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깨닫는 것을 뭐라고 그래요? ‘고의 성제’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이것을 ‘집의 성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텅 비고 아무것도 없으니까 ‘멸의 성스러운 진리’이며,

‘이것이 거기에 이르는 길이다’, 이게 ‘도의 성제’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현실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해서 원인이 나오고 궁극적인 도달할 목적지가 나오고,

그다음에 구체적인 실천으로서 우리가 가야할 길이 나오는 것을

‘네가지 성스러운 진리’다 해서 ‘사성제(四聖諦)’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성제라는 교리를 외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 삶에서

‘아, 이게 고(괴로움)이구나,

 이것의 원인이 이거였구나,

 더 살펴보니 텅 비었구나,

 아 그러면 이렇게 집착없이 나아가면 그 텅 빈 자리를 체득을 하겠구나.’

 

자기 삶 속에서 ‘바로 이게 괴로움이구나’, 그리고 ‘이렇게 나아가야 되겠구나’,

이렇게 해야 길이 열리는 겁니다.

이건 너무나 분명한 겁니다. 어려울 게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 파먹고 와서, 소고기국 먹고 걸어와서 이해가 안되는 게 아닙니다.

오늘 아침에 죽 먹고 왔으면 이해가 될 텐데,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초점을 딱 잡아서 공부를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당시에 어떻게 말씀하셨느냐?

괴로워서 찾아온 사람도 부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니까, 얼굴이 환하게 밝아집니다.

 

부처님 말씀 1. 비사카 부인의 고민

비사카 부인 : 내 사랑하는 손자가 죽어서 슬픕니다.

부처님 :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습니까, 적을수록 좋습니까?

비사카 : 많을수록 좋습니다.

부처님 : 다섯 명이 좋아요, 백명이 좋아요?

비사카 : 백명이 좋습니다.

부처님 : 백명이 좋아요, 이 사바티 성내에 있는 사람만큼, 서울 시민만큼이 좋아요?

비사카 : 서울 시민만큼 내 사랑하는 손자가 있으면 내가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부처님 : 아, 그래요? 서울 시내에 하루에 몇 명 죽어요?

비사카 ; 백 명이요.

부처님 : 응, 최소한 한 명은 죽겠지요. 그럼 당신 맨 날 울겠구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요? 설명해야 돼요? 이거 설명해야 된다면 바가지 거꾸로 쥐고 있다는 말이요.

자기 내부에 어떤 모순인 있는 지, 이런 문답 속에서 확 뒤집어버리는 거요.

그러니까 얼굴이 금방 밝아지는 거요.

 

부처님 말씀 2. 불가촉 천민 똥군 니이다이

똥꾼 니이다이가 똥지개를 지고 가다가, 부처님을 보자 뒷골목으로 피했습니다.

근데 부처님이 뒷골목까지 와서 그와 부딪치고, 거기다 똥물까지 뒤집어 썼습니다.

당시 불가촉 천민이란 브라만(승려)이나 크샤트리아(왕족, 귀족) 계급의 그림자만 밟아도,

단지 그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하더라도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천민의 손이 내 몸에 닿으면 내 몸이 더러워져서 아무리 수행을 해도 천상에 가지 못한다고 믿었습니다.

즉 불가촉 천민은 그 자체가 부정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피했는데 부처님하고 부딪혔으니, 꼼짝없이 죽었습니다.

근데 부처님은 니이다이를 이끌고 냇가에 가서 씻으라 했습니다.

똥은 냄새 나지만 씻으면 깨끗해집니다.

본래는 깨끗한 몸인 데 똥이 묻어서 냄새가 나지만 씻으면 깨끗해지는 것처럼,

‘니이다이여, 너도 그와 같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그와 같다’라는 게 뭡니까? 본래부터 천민이라는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근데 이 세상에 태어나가지고 ‘나는 천민이다’ 이런 똥물이 튀었단 말입니다.

옷을 빠니 그 냄새가 사라지듯이, 한 생각 바꾸게 되면 없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뒤에 이런 말이 붙은 겁니다. “내 법안에는 아무런 귀천이 없다!”

천하에 부정탄다고 모든 사람들이 다 금기로 여기는 그것도, 우리들의 한 생각에 달린 겁니다.

지금도 힘든 데, 이게 당시의 인도 사회에서 받아들이기가 쉬운 일이겠어요?

그런데 부처님은 그것을 어렵게, ‘계급이란 게 없다’ 이렇게 말한 게 아니라,

옷을 버리게 했다가 빨게 해서, 그걸 보여주면서 이야기하니까 금방 알아들었던 겁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대중들을 깨우쳤었습니다.

쉬워요, 어려워요? 쉽습니다.

굳이 경전을 갖고 여기서 뭐라고 설명할 필요도 없을 만큼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들은 늘 부처님을 존경하고 따랐던 겁니다.

 

이 강의는 '정토회 > 정토TV > 법문 보기 > 실천적 불교사상'에서  동영상으로 볼수 있습니다.

 

 

   *** 짧은 생각 ***

 

-. 내 생각이 옳은가(我執)?              내 생각은 다만 남과 다를 뿐이다.

-. 내 것이라는 것이 있는가(我所)?    내 것이라는 것은 다만 착각이다.

-. 나는 무엇인가(我)?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아집과 아소는 약간 이해할 수 있는 데, 我는 그나마도 안됩니다.

하기야, 평생을 수행해도 모르는 데, 벌써 안다면 웃기는 이야기이겠지요.

 

-. 무유정법 : 진리는 정해져 있지 않다. 진리를 설명하는 방편과 진리 자체를 혼돈하지 말자.

 

무아, 공, 팔정도, 사성제 등은 다음에 다시 나오리라 여기고, 더이상 알려고 하지도 않고 넘어갑니다.

점점 어려워집니다. 너무 어려워지면 중간에 포기할 수도 있는 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