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면 해탈할 수가 있습니다.
열반에 이르고 해탈을 하게 되면, 인생이 행복해지고 자유로워집니다.
정말로 행복해지고 자유롭고 싶으면 그 길로 나아가야 하는 데, 우리는 거꾸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거꾸로 간 사실을 모를 때는 헤매지만, 길을 잘못 들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부터는 제대로 갈 수가 있습니다.
잘못된 것이 잘못된 줄 모르는 게 문제이지, 잘못된 줄 안다는 것은 이미 반은 깨달은 겁니다.
깨닫지 못한 자의 특징이 ‘괴로움’이라 그랬는데, 우리는 지금 괴로운 줄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괴롭다, 괴롭다’ 하면서도 정작은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이렇게 생각합니다.
괴로움의 원인을 알려고 하기는 고사하고, 인생이 괴롭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즉, 괴로움이 괴로움인줄 모르니까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럼 ‘괴로움’이란 게 뭘까요?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고통
가장 대표적인 게 신체적 고통인데 신체적 고통은 대부분 병고로부터 옵니다.
아프면 괴롭습니다.
미워함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면 그 사람이 괴로운 게 아니라, 내가 괴롭습니다.
미워하는 것이 감기증상처럼 조그맣게 나타난 것이 섭섭한 것이고,
점점 강해져서 암처럼 치료 불가능할 정도로 커진 게 증오심입니다.
성냄
화내고 짜증내는 것은 스트레스 받아서 그렇습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처음에는 ‘보기 싫다, 꼴도 보기 싫다!’ 하다가,
이게 점점 심해져 중증이 되면 ‘죽여버리고 싶다!’ 이렇게 변합니다.
그러니까 죽이는 것하고 보기 싫은 것은, 크고 작은 강도의 차이만 있지 같은 종류입니다.
화를 벌컥 한번 내면, 처음에는 소화가 안되다가, 목이 뻣뻣해지고,
머리도 아프다가 나중에는 눈이 침침해집니다. 이게 화병입니다.
화를 참는 것은 수행이 아니고, 화를 내는 것도 수행이 아닙니다.
화를 참으면 괴롭습니다.
괴로움을 없애는 게 수행이지, 괴로운 것은 수행이 아닙니다.
화가 나지 않는 세계로 나아가야 수행이지, 화를 참는 것은 수행이 아닙니다.
참는 것이 수행인 줄 아는 것과 같이 공부를 뭔가 잘못하니까,
수행을 해도 진척이 없는 겁니다.
공부를 잘못한 것은 누구 탓이냐, 바로 스님 탓입니다.
선생이 제대로 안가르쳐 주어서 진척이 없는 겁니다.
고독
쓸쓸하고 외롭고 소외감을 느끼는 것도 괴로움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과 같이 살아도, 길거리 가면 부딪치는 게 사람이어도,
남편이나 아내하고는 한 이불 밑에 살아도, 너는 너고 나는 나입니다.
세상에 나를 알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
내 속에 있는 말 한마디 하나 마음 놓고 할 만한 사람 없어,
이런 게 꽉 쌓여있는 겁니다.
슬픔
부모가 죽었다고 슬퍼서 산소에 가서 울고, 제사 지낼 때도 울고,
베갯닛이 다 젖도록 밤새도록 엎어져서 웁니다.
이불 뒤집어쓰고 밤마다 우는 정도면 완전히 중증입니다.
후회
‘아이고, 내가 자식으로서 왜 그리 부모한테 그리 잘못했던고...’
남편 죽고 난 뒤에 ‘내가 조금만 더 잘했으면, 뭐 어땠으면..’ 하고 후회합니다..
후회하면 괴롭습니다.
방황
허전하고 공허해서 가만 못있는 경우도 있지만, 근원적으로 길을 못찾아서 그렇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못 가지는 경우입니다. 뭐 하러 사나 싶기도 하고...
나이 사십에서 오십 넘어가는 여자 분들은 고독과 방황, 이런 병이 겹칩니다.
젊어서 부부가 막 싸울 때만해도 ‘너 아니면 내가 못 사냐!’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남편한테 쏟던 정이 제대로 안 먹혀들면 그걸 자식한테 쏟습니다.
‘자식만큼은 내 인생을 행복하게 해 줄 거다,’ 하고 온갖 정을 다 쏟지만,
애들이 중학교쯤 들어가면 엄마를 귀찮게 생각합니다.
‘엄마 간섭하지 마!’ 이 한마디가 어떤 때는 가슴에 못이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 밥해주면 남편은 출근하고 애들도 다 학교가 버리고,
아무도 없는 빈집에 혼자 떡 남아가지고 있으면 공허하죠?
그때 거울을 가만 쳐다보면 언제 생겼는지 여기 주름살이 생겨있습니다.
전에 같으면 '까짓것 너 아니면 못사나' 이래 생각이 들었는 데,
나이 40이 넘고 얼굴에 주름살이 지니까 온갖 것에 대한 자신이 없어집니다.
어디가도 누가 받아줄 사람도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런 공허함이 여러분들이 말하는 갱년기 장애입니다.
나이 40에 결혼해서 갓난애 낳아 키우는 사람은 40대에 갱년기 장애가 안옵니다.
애 키운다고 정신이 없어서 40대가 언제 넘어가 버렸는지 모릅니다.
갱년기 장애는 육체적인 것이 아니고 정신적인 질환입니다.
아픔
보고 싶은 사람 못 봐서 가슴 아프고, 하고 싶은 일 못해서 가슴 아프고,
늙은 자기 얼굴 보면 젊은 날을 생각해서 가슴 아프고....
이런 현상들이 다 괴로움입니다.
여러분들은 괴로움이다 하면 어떤 고통 이런 것만 괴로움이라 생각하는 데,
이런 것을 다 통칭해서 괴로움이라 그럽니다.
속상해서 화내고, 짜증내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누가 죽었다고 슬퍼하고,
허전하고, 방황하고, 고독하고, 이런 것들이 다 고(괴로움)입니다.
생각해보면 여러분들의 삶은 ‘고’의 천지죠?
그래서 인생을 ‘고의 바다’다, ‘고해(苦海)다,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기쁨이라고 말하는 것도 결국에는 ‘고’로 바뀝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재미있는 것들도 많이 있는 데, 인생이 왜 고인가?’, 이렇게 묻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기쁨이라고 하는 것마저도 시간을 지내놓고 돌아보면 다 괴로움으로 바뀝니다.
결혼하고 싶어서 안달인 사람은 결혼 못해서 괴롭습니다.
결혼하면 기뻐하지만 죽을 때까지 남편이나 아내에게 시달려서 괴롭고, 자식 못 낳아서 괴롭습니다.
자식을 낳으면 기쁘지만 그게 씨앗이 되어 또 애를 먹입니다.
잘될 줄 알고 애써 키워 놨는데 나중에 보니 곡식이 아니라 피입니다, 잡초입니다.
인생의 행복은 남편과 아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만,
옛말에 ‘이 원수야! 하는 건 두 개밖에 없다. 남편하고 자식하고...’, 이게 우리 삶의 현실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괴로움에 푹 빠져서 괴로워하면서도,
괴로움이 뭔지를 모르고 그냥 허우적대며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 순간순간 어떤 달콤한 맛에 빠져서 살아간다 이말입니다.
이상한 성격을 가진 남편한테 계속 두들겨 맞고 온갖 고통을 겪어도,
가끔 한 번씩 ‘너 아니면 못살아’ 이렇게 위로해주고, 어디 가서 옷 한 벌 사다주고, 반지하나 끼워주면,
그 맛에 이혼할려다가 또 붙어살고 이혼할려다가 또 붙어살고...
이렇게 살며 인생 몇 십년 흘려보내는 것처럼,
순간순간 오는 그런 몇 가지 달콤함에 맛을 들이고 팔려가지고 이 고해의 세상을 그냥 흘려보내는 겁니다.
거기서 근원적으로 빠져나올 생각을 못하며 살고있다 이겁니다.
옛사람들은 인생을 어떻게 묘사했느냐,
아무 숨을 데 없는 황야에서 어떤 사람이 성난 코끼리에 쫒겨 도망을 갑니다.
인도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사자나 호랑이가 아니고 성난 코끼리입니다.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도망을 가다가 큰 웅덩이를 발견합니다.
거길 내려갈 길이 없는 데, 마침 칡넝쿨을 발견하고는 그걸 타고 내려갑니다.
‘휴, 살았다!’ 하고 위를 보니 코끼리가 내려다보면서 왔다갔다하고 있습니다.
옆을 보니 벽에서는 코브라가 혀를 날름거리고 있고, 바닥을 내려다보니 또 뱀들이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딱 매달려 있는 데, 흰 쥐하고 검은 쥐가 와서 그 칡넝쿨을 갉아먹습니다.
완전히 절망하고 너무도 괴로워서 입을 쩍 벌리고 헐떡거리고 있는 데,
나뭇가지에 달려 있는 벌집에서 꿀이 한 방울 똑 떨어져 혓바닥에 맺힙니다.
순간 그 달콤한 맛에 쪽쪽쪽 빨아댑니다. 이렇게 깜짝하고 있는 게 인생이랍니다.
(제5강에 계속합니다~~)
이 강의는 '정토회 > 정토TV > 법문 보기 > 실천적 불교사상'에서 동영상으로 볼수 있습니다.
*** 짧은 생각 ***
깨달으면 인생이 행복해지고 자유로워진다.
깨닫지 못한 자의 삶의 특징은 '괴로움'인데, 우리는 정작 우리 삶이 괴로운 줄도 모르고 살고 있다.
우리의 삶이 '괴로움'이란 것만 알아도 벌써 반은 깨달은 것이다.
괴로움에는 고통, 미워함, 성냄, 고독, 슬픔, 후회, 방황, 아픔 등이 있다.
기쁨마저도 그것은 괴로움의 근원이 되는 데,
정작 우린 한 순간 달콤함에 빠져 괴로움에서 벗어나려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여기까지 이해는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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