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1. 실천적 불교사상

[법륜스님의 '실천적 불교사상'] 제5강 불교는 우리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가? - 두 번째

상원통사 2014. 4. 10. 22:07

(~~ 제4강에서 계속)

 

여러분들은 지금 재물이나 지위나 자식이나 그 어떤 달콤한 맛에 팔려서,

자기 상황이 어떻게 되어있는 지, 괴로움이 뭔지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괴로움이란 그 본질을 깊게 관찰하지 않고서는 거기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그냥 대강대강 하는 것은, 경계에 부딪히면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맙니다.

( 경계 : 여기서는 ‘얻으려 집착하고 있는 것’을 뜻함 )

 

‘우리 인생은 고해다, 늘 갖가지 괴로움으로 쌓여있다’ 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인정하고 알아차리면 벌써 반은 해결한 겁니다.

 

괴로움이라는 것은 보통 때는 잘 모르고, 어떤 한계에 도달할 때야 알게 됩니다.

즉 암 선고를 받든지, 사고로 죽을 뻔하든지, 부도로 완전히 거지가 되어서야,

‘재물이라는 게 내 것이 될 수가 없는 거구나, 재물에 의지했던 내가 어리석구나’,

또는 ‘이 육신에 의지했던 내 인생이 어리석구나’ 라고 느낍니다.

우리는 이렇게 어떤 ‘고(괴로움)’가 극치에 이르러서야 ‘이게 괴로움이구나’ 하는 걸 자각하기 시작합니다.

 

부처님은 중병에 걸려 사는 사람의 심정, 늙었을 때의 심정, 죽을 때의 심정을,

모두 다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기에 그것들이 의미 없다는 것을 젊은 날에 깨우쳤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계상황에 다다라서야 겨우 눈을 뜹니다. 그나마도 그 상황이 지나가면 또 잊고 지냅니다.

병이 날 때는, ‘스님,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병만 나으면 문경에 가서 꼭 공부하겠습니다.’ 이러지만,

병 나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런 생각이 싹 사라집니다.

 

만약 어떤 ‘괴로움(고)’을 계기로 눈을 뜰 수만 있다면,

남이 볼 때는 괴로움때문에 불행한 것 같지만 그 사람에게는 오히려 큰 행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괴로움을 계기로 인생의 큰 전환기가 되는 것입니다.

 

남편과 도저히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 ‘결혼생활 자체가 괴로움이구나’,

이렇게 느끼고 모든 걸 버리고 절에 들어와서 공부를 하다가 탁 이치를 깨달았습니다.

‘내가 이걸 모르고 죽었으면 내 인생이 뭐가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근데 어쩌다 내가 이런 복을 얻게 되었지?’, 생각해보니 바로 남편 덕택입니다.

남편이 그 때 그렇게 안했으면 절에 들어와 이 공부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탁 엎드려 남편보고, ‘아이고, 당신이 보살입니다.’ 라고 합니다.

남편은 똑같은 남편이지만, 생각이 바뀌면 원수가 불보살로 바뀝니다.

원수도 자기 속에 있고 불보살도 자기 속에 있는 겁니다.

남편은 원수도 아니고 불보살도 아닌 데,

내가 원수같은 마음을 내니 원수가 되고, 내가 불보살 같은 마음을 내니 불보살이 되는 겁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불보살의 마음을 내는 겁니다.

 

‘뭔가 얻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합니다.

남편 내말 잘 듣게 해주세요, 애들 공부 잘하게 해주세요, 재물 많이 모이게 해주세요,

하는 장사마다 다 잘되게 해주세요, 병고 없이 해주세요....

 

그러나 ‘뭔가 깨달아야 행복해진다’ 하는 사람들은 이런 기도 안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재앙이 밀어닥치더라도 깨달을 기회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그런 불행이나 장애도 깨달음의 계기가 됨을 안다면, 이 세상에 겁날 일이 없습니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서 두려움이 없는 게 아니고 무슨 일이 일어나도 별 상관이 없습니다.

마장(魔障, 악마의 방해)이 높으면 높을수록, 크면 클수록,

깨달음의 높이와 깨달음의 깊이가 커져가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 맨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생은 괴로움이다.’ 하는 걸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괴로움이 늘 떠나지 않구나, 인생은 괴로움이다, 고해다.’

이렇게 아는 것이 성스러운 진리 가운데 첫 번째 진리입니다.

 

괴로움은 왜 생기는가?

인생이 괴로움이라면, 이런 괴로움은 어떻게 생겨날까?

괴로움은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만든 것입니다.

괴로움이 생길 수밖에 없는 그런 생각을 하고 말을 하고 행동을 했기 때문에,

그 결과로 괴로움이 내게 온 것입니다. 단지 본인은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쥐가 쥐약을 먹는 것을 옆에서 보는 사람은, 저거 먹으면 죽을 것이라는 걸 압니다.

저거 먹으면 배 아프다가 목마르다가 나뒹굴다 죽는다는 걸 다 압니다.

정작 쥐 자신은 그걸 모르고 먹습니다.

먹고나서 배 아프고 목 말라 뒹굴지만, 왜 아픈지 원인도 모르고 괴로워하다가 죽어갑니다.

 

왜 이렇게도 훤한 이치를 쥐는 모를까요?

제 정신이 아니어서 그렇습니다.

‘미쳤다, 제 정신이 아니다.’ 이걸 한자어로 ‘전도몽상(顚倒夢想)’ 이렇게 표현합니다.

‘전도’라는 것은 ‘거꾸로 되었다’는 말이고, ‘몽상’은 ‘꿈꾼다’는 말입니다.

‘미쳐서 제 정신이 아닌 상태다’, 이 말입니다.

 

왜 미치고 제 정신이 아닐까요?

욕심에 눈이 어두우면 그렇게 됩니다. 욕심에 눈이 어두워 미친 상태가 되는 겁니다.

쥐가 먹고 싶은 욕심에 눈이 어두워, 못먹게 말려도 기어이 먹고서 그렇게 되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가 나면 그렇습니다. 화가 나면 눈에 뵈는 게 없어집니다.

부부 싸움할 때 남편이 화가 되게 나면 아내에게 ‘죽여 버리겠다!’고 합니다.

아내는 ‘그래, 한번 죽여 봐!’ 이렇게 나옵니다.

그냥 큰 소리 치는 게 아니라, 이때는 순간적으로 '정말 죽여버리겠다', ‘정말 죽어도 좋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화가 나서 헤까닥하여 눈이 어두워져버린 겁니다.

 

욕심에 눈이 어두운 것을 탐(貪),

가 나서 눈이 어두운 것을, 진(瞋),

어리석어서 눈이 어두운 것을 치(癡),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 가지를 ‘마음을 병들게 하는 세 가지 독이다’, 그래서 삼독심(三毒心)이라 말합니다.

 

‘밥 먹고 싶다’ 이런 걸 탐심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먹고 싶은 생각에 빠져서 안보이는 증상이 나타날 때 ‘탐심’이라 말합니다.

 

시장에 오천원어치 물건 사러 갔다가, 물건을 보는 데 눈이 팔려가지고,

카드를 긁거나, 남의 돈 빌려서 물건 사고, 집에 와서는 후회하는 경우가 있죠?

이런 게 탐심의 아주 작은 증상입니다. 욕심에 팔리는 겁니다.

 

아편에 중독된 사람이 있습니다.

옆 사람이 볼 때는, 아편을 피우고 중독이 되면 어떻게 된다는 걸압니다.

건강 해치고, 재산을 탕진할 거고, 가정파탄 날 것이 뻔합니다.

근데 본인은 거기에 중독이 되면 거기에 꽉 사로잡혀버리기 때문에,

건강이 나빠지는 것을 알아채기 힘들거나, 알아도 멈추지를 못합니다.

그걸 구하기 위해서 논밭 다 팔고, 마누라 팔고, 자식까지 팝니다.

이게 중독된 현상에서 나타나는 것이지만, 중독이 되면 본인은 잘 모릅니다.

 

그러는 것처럼 우리는 탐진치 삼독에 딱 중독이 되어있기 때문에,

‘에이, 욕심 안내고 어떻게 살아’, ‘화 안내고 어떻게 살아’, 이렇게 말합니다.

거기 중독이 되어 있으니까, 욕심내고 화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아편에 중독된 사람이 아편 피우는 걸 당연하게 여기듯이...

 

담배에 중독이 된 사람에게 끊으라고 하면 ‘그게 뭐 쉽게 끊기나?’ 이럽니다.

그러나 담배 안 피우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냥 안피우면 됩니다. 그거 뭐 특별한 방법이 있어요? 그냥 안피우면 되지...

근데 중독이 되면 그게 안됩니다. 중독이 되면 자꾸 방법론을 찾습니다.

 

우리들은 수행에도 자꾸 방법론을 찾습니다.

‘집착을 놔라’ 하면, 집착이 괴로움의 근원인줄 알면 그냥 집착을 탁 놓으면 되는 데,

‘어떻게 놓습니까?’, ‘놓기는 놔야 되는 데 안 놔지는 데요’, 이 말은 이미 중독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중독이 되면 끊임없이 방법론을 찾는 겁니다.

 

왜 삼독에 물드는가?

그러면 왜 사람이 이렇게 삼독에 물드는 걸까요?

원래 태어날 때는 안 피웠는데, 왜 멀쩡한 사람이 담배를 피울까요?

아편에 중독된 사람이 계속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 데, 왜 처음에 피우게 될까요?

왜 사람이 탐진치 삼독에 물들게 되느냐는 겁니다.

 

1. 아집(我執) : 늘 자기 생각이 옳은 것 같다.

우리들에게는 늘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늘 자기 생각이 옳은 것 같죠?

‘에이, 사람 생각이 틀릴 수도 있죠’, 이렇게 말은 하지마는, 속마음은 안 그렇습니다.

옳은 생각을 하는 게 맞는 것이지, 틀린 생각을 뭣 때문에 합니까?

‘내 생각이 옳다, 내 의견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런 생각이 듭니다. 즉 당신 생각은 ‘틀렸다’ 이겁니다.

이런 것을 ‘아집(我執)’이라 합니다.

‘내 생각이 옳다’ 하는 이 심리 현상을 ‘아집’이라 말합니다.

 

2. 아소(我所), 아소유(我所有) : ‘내 것이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두 번째, 우리들은 살면서 뭐든지 내거다 네거다 구분합니다.

어떤 집에 불이 났습니다.

‘내거다’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는 사람은 울고불고 불속에 뛰어 들어가는 데,

다른 사람들은 뒷짐지고 불구경합니다,

똑같은 집인데, 집에 불이 났기 때문에 괴로운 게 아니라,

내거다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에 이런 괴로움이 생기는 겁니다.

 

3. 아(我) : ‘나다’

세 번째 더 좁히면, ‘나다!’ 이겁니다, ‘나다’

 

즉, 탐진치 삼독이 일어나는 근본 무지는, '아와 아소와 아집'에 있는 겁니다.

( 무지 : '사실을 모름' 또는 '잘못 이해하고 있음' )

 

아와 아소와 아집을 한마디로 하면 아라 합니다.

‘나다’, ‘내거다’, ‘내가 옳다’ 이런 것은 나로부터 시작합니다.

나로부터 시작해서 내거다 하니까 많이 가져야 되겠고, 내 의견은 옳다 하니까 관철이 되어야 되겠죠?

많이 가지려 하면 재벌이 되는 거고, 내 의견이 옳다 하면 독재자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나아가는 겁니다.

 

근원적으로 아, 아소, 아집, 즉(我)라고 하는 것이 괴로움의 근본입니다.

그러니까 ‘나다’ 하는 것에 집착하거나, ‘내거다’ 하는 데 사로잡히거나, ‘내가 옳다’ 하는 데 사로잡히면

바로 탐진치 삼독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 탐진치 삼독에 물들면 중독이 되는 것이고, 중독이 된 상태를 업장이라 합니다.

( 업장 : 악한 행위를 저지른 과보로 받는 장애 )

업장은 스스로 힘을 일으켜 음력을 불러 일으킵니다.

담배에 중독이 되면, 담배가 담배를 피우고 싶은 마음을 끌어잡아 당기고, 거기 끌려가서 또 피웁니다.

그렇게 재산을 또 쌓고, 업장을 또 만들어서, 그 과보로 괴로워 하는 겁니다.

 

 

(제6강에 계속합니다~~)

 

이 강의는 '정토회 > 정토TV > 법문 보기 > 실천적 불교사상'에서  동영상으로 볼수 있습니다.

 

 

*** 짧은 생각 ***

 

인생이 괴로움인 줄 알면 벌써 반은 깨달은 것이다.

괴로움이 괴로움인 줄 모르는 것은 욕심에 눈이 어둡고, 화나서 눈이 어두워져서 그렇다.

탐(욕심), 진(화), 치(어리석음)를 '마음을 병들게 하는 세가지 독이다'해서 '삼독심'이라 한다.

탐·진·치 삼독이 일어나는 근본무지는 아·아소·아집에 있다.

‘내 것이다(아소)’ 하여 탐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내가 옳다(아집)’는 것에 집착하여 분노가 일어나고,

‘나다, 내가 한다(아)’라는 어리석은 마음(치심)이 일어난다.  

'아·아소·아집'을 한마디로 '아'라 하고, 아라고 하는 것이 괴로움의 근본이다.

즉, 우리의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가 만든 것이다.

 

나는 왜 담배를 배웠을까?

그냥 담배 피우는 것이 멋져보여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담배 피우는 것이 멋져 보였다는 것은 어리석음(癡, 치)때문인 것은 이해가 가는 데,

'치(어리석음) = 아(나)' 라는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물음표' 하고 넘어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