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강에서 계속)
꿈꾸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꿈꾸고 있는 줄 모릅니다.
꿈에 강도가 칼들고 쫒아오면 ‘사람 살려라!’ 하고 도망을 갑니다.
꿈꾸는 사람은 다급해서 ‘사람 살려라!’ 하고 외치지만, 옆에서 듣고있는 사람은 ‘헛소리하고 있네!’ 라고 합니다.
꿈꾸는 사람에게는 꿈꾸고 있는 동안이 현실입니다.
허상이 허상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그 사람에게는 실상으로 보입니다.
깨야 꿈인 줄 알지 깨기 전에는 꿈인 줄 알 수가 없습니다.
깨달아봐야 얼마나 무지 속에서 살고 있었는지 알지, 그 전에는 알 수가 없습니다.
꿈 속에서 강도가 나타났을 때의 해결방법은 뭐가 있을까요?
내가 힘이 나서 강도를 때려 잡아버리거나, 힘 있는 어떤 존재가 와서 강도를 잡아주거나,
또다른 존재가 나를 숨겨주거나 하는 이런 해결책밖에 없습니다.
거기에서는 미워해야 할 강도와 나를 구해주는 은인만 있습니다.
그러나 꿈을 깨면,
미워해야 할 강도도 없고, 살려주었다고 고마와 할 은인도 없고, 해결해야 할 괴로움도 없습니다.
문제가 있어서 그걸 해결하는 게 아니라, 해결할 과제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강도를 쫒은 것도 아니고, 힘으로 이긴 것도 아니고, 누가 숨겨준 것도 아닌 데,
그 강도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꿈을 깨봐야 꿈인 줄 아는 것처럼, 안경을 벗어봐야 안경색깔 때문에 벽색깔이 달라보였다는 걸 알 수가 있죠?
그런데 어떤 계기로 한 번만이라도 안경을 벗어본 경험이 있다면,
벽색깔이 파랗다 빨갛다 싸우더라도 혹시 안경 때문에 잘못 본 것이 아닐까, 이렇게 돌아보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혹시 꿈을 꾸면서도 이거 꿈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해본 경험이 있어요?
그럴 때는 도망가는 게 아니라 눈이 떠집니다.
금방 떠지느냐 시간이 걸리느냐의 차이는 있지만 눈은 틀림없이 떠집니다.
늘 우리가 '허상을 보고 있다, 눈 떠야 되겠다, 깨달아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전심전력을 기울여서 깨닫는 데 집중을 하면, 틀림없이 눈은 떠집니다.
즉시 눈이 떠지는 사람도 있고, 10년만에, 30년만에 떠진 사람도 있습니다.
눈뜨는 데 걸리는 시간이란 것은 1초나 30년이나 본인에게는 똑같습니다.
본인은 거기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 지 스스로는 잘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마치 방금 전에 잠들었던 것 같은 데도 1시간씩 잔 경우도 있고,
1시간 잔 줄 알고 눈 떠보니 10분밖에 안 지난 경우와 똑같습니다.
우리는 삶에 있어서 눈을 떠본 경험이 많이 있습니다.
이거 잘못 생각했구나, 또는 잘못 알았구나 하는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때 그 문제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돌이켜보려 한다면 깨달을 수 있지만, 우린 이런 생각을 안하고 그냥 사는 겁니다.
매일 꿈을 꾸지만, 이게 꿈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못하고 꿈꾸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못 깨닫는 겁니다.
우리는 깨어나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봐야 합니다.
밝은 길은 가기 쉽고, 분명하고, 간단합니다.
깜깜한 밤에 가게 되면, 즉 길을 모르면, 복잡하고, 헷갈리고, 한 발 떼기도 어렵습니다.
깨어있지 못한 상태에서는 세상살이가 엄청나게 어렵고 복잡합니다.
근데 딱 눈을 뜨면 세상살이가 간단하고 분명해지고 아주 쉬워집니다.
불교에서 깨달으라는 말은 세상을 쉽게 사라는 겁니다.
그러나 쉽게 산다는 말을 대충대충 산다고 들으면 안됩니다.
눈감고 대충대충 살면 큰일납니다.
불교의 특징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가르침이 아주 간단하다.
둘째, 가르침이 아주 분명하다.
셋째, 가르침이 아주 쉽다.
복잡하고, 흐리멍텅하고, 어려우면 그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이렇게 분명하고 간단하고 쉬운 가르침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방 안에 전등을 켜더라도 하나도 안보인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눈 감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밝아도 눈감고 있으면 안보입니다.
눈감고 있는 사람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나는 다 안다, 나는 깨달았다' 하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나는 하나도 모른다, 난 모르겠다' 이런 사람입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뭐라고 하는 데,
‘아이, 몰라요!’, 이런 사람은 듣기 싫다는 말입니다.
‘다 안다니까!’, 이런 사람도 듣기 싫다는 말입니다.
다 안다는 사람하고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은 듣기 싫다는 사람입니다.
듣기 싫다는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가 않습니다.
듣기 싫다는 사람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종교, 계급, 피부색, 언어, 남녀노소, 지식유무 등과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싫다는 생각을 꽉 잡고 있는 사람은 아무튼 안보입니다.
근데 그 싫다는 생각을 주로 어떨 때 하느냐?
난 기독교인이니까, 난 절에 처음 왔으니까, 난 오래 다녔으니까, 난 중이니까,
이렇게 뭔가를 하나 붙잡고서 그걸 거부할 때 일어납니다.
'법성계'에서는 이런 예를 듭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립니다.
빗물이 필요한 사람은 바가지 들고 나가면 다 받을 수 있습니다.
큰 바가지 가지고 간 사람은 많이 받고, 작은 바가지는 작게 받습니다.
그릇의 크기에 따라서 많고 작음이 있지만, 다 물을 받아가긴 갑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서있어도, 옷만 젖고 한 방울도 못 받아간 사람이 있습니다.
바가지를 거꾸로 들고 있는 사람입니다.
바가지를 거꾸로 들고있는 사람은 아무리 애를 써도 한 방울도 안고입니다.
바가지를 거꾸로 들고있는 사람이 바로 ‘싫다’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제3강에 계속합니다~~)
이 강의는 '정토회 > 정토TV > 법문 보기 > 실천적 불교사상'에서 동영상으로 볼수 있습니다.
*** 짧은 생각 ***
꿈이 허상이라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현실도 허상이라는 것은 아직까지 와닿지 않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이 간단하고 분명하고 쉽다는 데, 정말 그럴까요?
벌써 의문이 쌓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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