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강에서 계속)
중도(中道) : 쾌락과 고행을 버린 제3의 길
고행이나 쾌락으로는 우리가 추구하는 해탈과 열반이라는 목적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 목적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삿(邪)된 길, 잘못된 길입니다.
고행과 쾌락의 길을 양단, 양극단, 또는 양변이라 합니다.
그 두 가지를 버린 중도의 길을 걸어야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지에 가장 빠르고 가장 완벽하게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 중도(中道)는 가장 바른 길이기에, 다른 말로 정도(正道, 바른 길)라 합니다.
정도에는 여덟 가지가 있다 해서 앞에 팔자를 붙이면 팔정도(八正道)가 됩니다.
그러면 구체적인 예를 한 번 들어봅시다.
술로부터 내가 완전하게 자유롭고 싶다, 이게 내 목표입니다.
어떻게 해야 술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느냐, 이게 과제입니다.
술이 먹고 싶을 때 먹는 것이 술로부터 자유로움입니까, 안 먹는 것이 자유로움입니까?
술을 안 먹는 것이 자유로움이고, ‘술은 먹어야 돼’ 이게 세속의 길입니다.
‘술 안 먹고 어떻게 사나, 술 안 먹고 무슨 재미로 사느냐’, 우리는 이렇게 반문합니다.
‘사업하려면 술 먹어야 되고, 친구들 만나면 한 잔 해야 되고, 생일 때도 술이 있어야 그래도 재미가 있지.’
하지만 그 술 때문에 갖가지 부작용이 나타나고, 이 술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 됩니다.
한잔 먹고 취해서 싸울 수도 있고, 화내고 거짓말할 수도 있고, 도둑질을 할 수도 있고, 살생할 수도 있고...
계율을 파하는 게 다 술 때문에 생길 수도 있습니다.
‘술을 먹어야 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술에 얽매어 있다’는 겁니다.
친구 생일 파티 갔는데 술이 없으면 ‘야, 왜 술이 없어?’ 이럽니다.
친구 집에 오래간만에 갔는데 차만 내놓으면, ‘야, 오래간만에 왔는데 술도 한 잔 안주나?’ 이럽니다.
술을 먹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데 술이 없으니 찾게 되고, 찾는다는 것은 '술에 얽매어 있다!'는 겁니다.
반대로 ‘술은 안 먹어야 돼’,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데,
어느 스님께서 청정하게 수행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뵈었는데,
스님이 앉아있는 뒷쪽 벽장 안에 술병이 조르르르 있습니다.
보면 분별심이 나서, ‘아니, 수행자가 웬 술은?’ 이렇게 됩니다.
(분별심 : 나와 너, 좋고 싫음, 옳고 그름 따위를 헤아려서 판단하는 일)
술이 없어야 되는 데 여기 술이 있으니까 그 술을 보자마자 걸리는 겁니다.
술에서 자유로워지려면 둘을 다 놔버리면 됩니다.
‘술이 있어야 돼’ 하는 생각을 놔버리면 술이 없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술이 없어야 돼’ 하는 생각도 놔버리면 술이 있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는 술이 있든지 술이 없든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이 사람이 술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이해가 좀 되세요?
술을 먹어야 ‘겠다’, 술은 먹지 말아야 ‘겠다’, 이 두 가지를 다 놔버리는 겁니다.
‘겠다’ 라는 것은 ‘의지’입니다. 의지를 불교의 용어로 말하면 ‘행’이라 합니다.
‘행’은 ‘업’의 원인입니다.
(행 : 의도(意圖)하고 지향하는 의식 작용
업 : 의지(意志)에 의한 신심(身心)의 생활을 의미)
그러니까 ‘먹어야 된다, 먹지 말아야 된다’, 또는 ‘먹어야 겠다, 먹지 말아야 겠다’ 는 두 가지를 다 놔버리는,
즉 의지를 놔버리면, 행을 버려버리게 되면, 그의 삶에서는 업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게 불교 옛날 용어로 하면 ‘무위(無爲, 해도 함이 없다)'라 합니다.
허공에 새가 날아갔지만 그 자취가 없는 것처럼, 해도 함이 없다 이겁니다.
그걸 선에서는 ‘방하착(防下着, 내려놓다)'이라 합니다.
둘을 다 놔버려라, 생각을 놔버려라. 이것이 중도입니다.
왜 이 중도의 길로 가면 깨달을 수가 있고,
깨달음, 그 실제의 세계가 어떻기 때문에 우리가 중도의 길을 가야 되느냐?
이것(깨달음과 중도)은 서로 밀접하게 딱 결합이 되어있습니다.
술 그 자체는 좋은 겁니까, 나쁜 겁니까?
술을 먹는 사람은 술이 좋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건강에도 좋고 혈액순환에도 좋다...
반대쪽에서는 술은 나쁘다고 합니다. 술은 거기 중독성이 있고 이래이래서 나쁘다...
근데 실제로는, 술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고 그냥 술일뿐입니다.
거기에는 독이라 할 것도 없고 거기에는 약이라 할 것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먹으면 약이 될 때도 있고, 어떤 사람이 먹으면 독이 될 때도 있는 겁니다.
술 그 자체는 약도 아니고 독도 아니고, 바로 인연을 따라서 나타나는 겁니다.
그걸 공(空, sūnya)이라 합니다,
(공 : 실체(實體)는 불변성(不變性)과 불가분성(不可分性)을 그 근본 속성으로 하는데,
이러한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교적 존재론의 기본사상)
공하기 때문에 어떤 조건에 처하면 독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다른 조건에서는 약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 안에 독성이 있고 약성이 있어 이렇게 저렇게 나타나는 게 아니라, 본래 아무런 성품도 없습니다.
어제 얘기한대로 서울 가는 길은 정해져 있지 않는 데,
인연을 따라서 동이 되기도 하고 서가 되기도 하고, 북이 되기도 하고 남이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 자체는 누구냐? 공(空)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인연을 따라서 맺어집니다.
남자하고 관계를 맺으면 아내가 되고, 어린애하고 관계를 맺으면 어머니가 되고,
전철을 타면 승객이 되고, 절에 오면 신도가 되고, 학교가면 학부모가 되고, 이렇게 인연을 따라서 나타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인연을 따라서 나타나는 그것에 사로잡혀서,
나는 엄마다, 나는 선생이다, 나는 학부형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인연을 따라서 잠시잠시 나타나는 것을, 이건 약성이 있어서 약이다, 이건 독성이 있어서 독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주먹으로 사람을 한 대 딱 쳤다면 잘한 일이에요, 잘못한 일이에요? 인연에 따라 다릅니다.
여자는 싫다고 하는 데, 남자가 그 여자를 좋아해 따라가다가 껴안으려고 합니다.
지나가던 내가 그 남자의 추행을 보고 참을 수 없어 멱살을 잡고 한 대 때렸습니다.
남자가 볼 때는 내가 나쁜 사람입니다. 얼마나 할 일이 없으면 남 연애하는 데까지 와서 주먹을 휘두르나 생각합니다.
여자가 볼 때는 구세주입니다. 요즘같이 다 외면하고 가는 시대에 그렇게 해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선악이 본래 있는 게 아니라 인연을 따라서 이렇게 여기서 보면 선이 되고 저기서 보면 악이 되고 이러는 겁니다.
모든 존재의 본질은 실체가 없다 : 무아(無我), 공(空)
그러니까 본질은 어떠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본질은 그 실체가 없습니다.
그것을 근본교리(소승불교)에서는 ‘무아’다 그렇게 말하고, 대승불교에서는 ‘공’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남편이 어떤 행동을 하던 그것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잘한 것도 아니고 잘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행위가 있을 뿐입니다.
그 행위가 나에 견주어서 나의 어떤 이해관계가 결합하면서, 잘했다 잘못했다, 선이다 악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교회다니는 사람이 절에 다니는 한 사람을 꼬셔가지고 교회에 데려갑니다.
교회쪽에서 보면 잘한 일이지만, 절에 있는 사람은 참 나쁜 사람이라 합니다.
남편이 술을 먹고 늦게 들어옵니다.
집에서 아내가 보면 쓸 데 없이 돈 버리고 시간낭비 했다고 합니다.
그가 다니는 단골집 여자 주인은 요즘 같은 불황기에 꼬박꼬박 오셔서 보태주고 가니 고맙다 합니다.
이해가 좀 됩니까? 이해가 되는 것 같지마는 이해가 좀 안 될 겁니다.
선악이 없고 옳고 그른 게 없다고 하면,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렇게 생각이 들것입니다.
자기 현안문제를 이야기하면 자기한테 빠져서 이해하기 힘들지만,
자기 문제가 아닌 남의 문제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해하기 훨씬 더 쉬울 겁니다.
그것부터 우선 공부를 먼저 한 후, 조금씩 당겨와야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랫동안 자기 안경을 끼고 있기 때문에 가까이만 오면 벌써 이게 헷가닥 해버립니다.
그럼 다른 이야기를 하나 해봅시다.
이웃집 아이가 공부도 못하고 머리도 나쁘고 맨 날 놀러만 다닙니다.
그 어머니는 그 아이를 서울대학교에 넣어 달라고 계속 도선사에 가서 기도하고, 연주대에 가서 기도합니다.
여러분들이 볼 때, ‘아, 저렇게 열심히 기도하면 들어가겠다’, 이런 생각이 듭니까,
아니면 ‘아이구, 욕심만 많아가지고 쓸데없는 짓을’, 이런 생각이 듭니까?
누군가에게 빌어서 그런 사람이 다 대학에 들어갈 수 있으면 이 세상이 잘 돌아가겠어요, 어지러워지겠어요?
태어날 때부터 약간 지능이 모자란 부잣집 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쁘고 똑똑하고 좋은 대학교 나온 며느리를 구하려고 계속 선보러 다니는 걸 보면 무슨 생각이 듭니까?
거기 만약 우리 딸이 속아서 걸리면 큰 일 나겠지요.
근데, 각자는 다 그렇게 서울대 넣어달라고 기도하고, 좋은 며느리 구하러 다니고 있습니다.
우리 다 그렇게 하고있다는 말입니다.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면 오늘 우리들의 ‘바램’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 헛된 것들을 계속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의 삶이 늘 혼란스럽고 세상이 혼란스러운 겁니다.
부처님은 우리 세상의 혼란을 안정시키려고 가르침을 폈습니다.
근데 여러분들은 세상이 더 혼란해 지는 것을 부처님께 제발 좀 해달라고 이렇게 매일매일 빌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선 길을 가기 전에, 길이 똑바른 지를 미리 점검해보는 시간입니다.
여러분들도 며칠 동안 여기 강의가 들을 만한 건지 점검을 해야 되고,
나도 강의를 할 만한 지 점검을 좀 해야 된단 말이에요.
서로 생각이 안 맞는 사람끼리 앉아 있으면 시간낭비 하잖습니까?
그러니까 며칠간 조정 작업을 좀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서 출발을 하고 수행을 하면, 수행이 빠른 속도로 나아갈 수 있겠죠.
깨닫지 못한 세계는 생멸(生滅)이 있다.
그러면 깨닫지 못한 세계와 깨달은 세계를 나누어서 몇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깨닫지 못한 세계에서는 생멸이 있습니다. 태어나고 사라지는 게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고, 물건도 하나 만들어지기도 하고 깨지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이렇게 보면 아주 분명히 모든 것에는 생멸이 있습니다.
세 살짜리 어린아이에게 얼음으로 만든 조그마한 구슬을 요런 그릇에 담아 줍니다.
어린아이가 이 구슬을 가지고 놀다가 놔두고, 두 시간쯤 밖에있다 들어와 보니까, 구슬은 없고 그릇에 물만 담겨있습니다.
그럼 애가 뭐라고 할까요? ‘엄마, 내 구슬 어디 갔어? 구슬은 없고 물만 생겼네’ 이러겠죠.
구슬이 없어진 것은 멸이고, 물이 생긴 것은 생입니다.
아이는 멸하고 생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이가 볼 때는 아주 분명합니다. 이게 생멸관입니다.
아이는 왜 얼음은 없어졌다고 생각하고 물이 생겼다고 생각했을까요?
아이는 얼음과 물이 다르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얼음은 돌맹이 같은 것이고 물은 기름같은 것이라고, 전혀 다른 것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각각이 별도의 존재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얼음이 없어졌고 물이 생겼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이게 우리가 보는 세계를 상징하는 겁니다.
어린아이가 얼음구슬이 녹아서 물 되는 과정을 전체적으로 다 지켜본다면 얼음이 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얼음이 물로 변했다는 것은 ‘얼음은 없어진 것도 아니고 물은 생겨난 것도 아니다’ 이런 얘기입니다.
얼음과 물이 다르다고 생각을 하니까 ‘얼음이 없어지고 물이 생겼다’ 이렇게 관찰되었고,
얼음이 변해서 물이 되는 걸 보니까 ‘얼음이 없어진 것도 아니고 물이 생긴 것도 아니다’, 이렇게 알게 된 겁니다.
얼음이 없어지고 물이 생겼다 이것을 생멸이라 하고,
얼음은 없어진 것이 아니므로 불멸, 물은 생긴 것도 아니므로 불생, 이런 겁니다.
실제의 세계는 불생불멸(不生不滅)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못 알고 사물을 관찰하면 생멸하는 것처럼 느끼는 겁니다.
‘불생불멸하다’는 말은 ‘영원하다’ 이런 말이 아니라,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다’는 말입니다.
실제의 세계는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닙니다.
가짜의 세계, 잘못 관찰한 세계에는 생이 있고 멸이 있는 겁니다.
물 따로 관찰하고 얼음 따로 관찰하는 것처럼 부분만 관찰하거나 잠깐만 관찰하면,
생 따로 있고 멸 따로 있는 것처럼, 생이 있고 멸이 있는 것처럼 알게 되고,
그걸 전체적으로 긴 시간에 걸쳐서 자세하게 관찰해보면, 그건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구나 이렇게 알게 됩니다.
그래서 범부중생은 생멸관에 빠지고, 보살이 보는 세계는 불생불멸의 세계입니다.
얼음 같은 예는 쉬워요 어려워요? 쉽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니까 쉽지요.
생멸이 있는 세계는 왜 생멸이 있다고 봤느냐면 얼음하고 물이 따로따로라고 봤습니다.
얼음은 얼음이고 물은 물이다, 이게 ‘아(我)’라는 겁니다.
얼음은 얼음의 실체가 있고, 물에는 물의 실체가 있다, 이게 ‘아다, 아가 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얼음이 변해서 물이 되고 물이 변해서 얼음이 되었으니, 얼음이다 물이다 따로 말할 게 없죠?
얼음도 아니고 물도 아니다, 여기는 얼음이라 할 것도 없고 물이라 할 것도 없다.
즉 얼음이라고 할 만한 실체도 없고 물이라고 할 만한 실체도 없다.
다만 인연화합에 의해서 잠시 얼음의 모양이 되기도 하고 잠시 물의 모양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공이다, 아라고 하는 것이 없다’, 실제 모습은 그렇다 이겁니다.
아편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먹으니까 중독이 되고, 감기몸살 걸릴만한 사람한테 조금 주니까 금방 병이 나았고,
진통이 심한 이한테 주니까 진통이 멎었는 데, 또 어떤 사람은 먹었더니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양이나 그 사람의 경우나 조건에 따라서 나타나는 효과가 다 다릅니다.
이런 조건에서는 약이라 불리고, 저런 조건에서는 독이라 불리고, 또다른 데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불리고 이렇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존재 자체는 실체가 없으니 무아, 공 이렇게 말하고,
그것이 인연에 따라서는 갖가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법성계에서는 이걸 ‘불수자성 수련성’이라 합니다. 법성계 여섯 번째 보면 이런 말 나오죠.
불수자성(不守自性) : 스스로의 성품을 지키지 아니하고
불(不, 아니하고) 수(守, 지키지) 자(自, 스스로의) 성(性, 성품을),
이 세상 만물은 ‘나다’라고 하는 스스로의 성품을 지키지 않는다,
이게 ‘무아’라는 말이고, ‘법의 실상은 공이다’는 말입니다.
수연성(隨緣成) : 인연을 따라 이루어진다.
수(隨, 따라) 연(緣, 인연을) 성(成, 이루어진다),
‘아’라고 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인연을 따라서 갖가지가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 만물은 스스로의 성품을 고집하지 아니하고, 인연을 따라서 이루어진다.’
서울 가는 길은 동이다 서다 이렇게 어떤 정해진 길이 없다 이 말입니다.
인천사람에게는 동이 되고 춘천사람은 서가 되고 수원사람은 북이 되고, 이렇게 인연을 따라서 이루어집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논리상 아무런 빈틈도 없잖습니까?
이 강의는 '정토회 > 정토TV > 법문 보기 > 실천적 불교사상'에서 동영상으로 볼수 있습니다.
*** 짧은 생각 ***
중도 : 쾌락과 고행을 버린 제3의 길
중도의 길을 걸어야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지(행복, 해탈, 열반)에 가장 빠르고 가장 완벽하게 도달할수 있다.
‘술이 있어야 돼’ 하는 생각은 쾌락, ‘술이 없어야 돼’ 하는 생각은 고행, 있든지 없든지 상관이 없는 것은 중도.
술은 약이 될 때도 있고 독이 될 때도 있으나, 술 그 자체는 약도 아니고 독도 아니고,
인연을 따라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
나라는 존재 자체는 변함이 없으나, 나와 맺는 인연에 따라,
남편이 되고, 회사원이 되고, 승객이 되고, 손님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보기에 존재하는 것 같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본질은 그 실체가 없다.
이것을 소승불교에서는 ‘무아’, 대승불교에서는 ‘공’이라 말한다.
온도 조건에 따라 물은 얼음이 되기도 하고 물이 되기도 한다.
내가 얼음(我)이라면,
얼음구슬이 생기는 것은 내가 태어나는 것과 같고,
얼음구슬이 녹는 것은 내가 죽는 것과 같다.
내가 얼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태어나기도 하고 죽기도 하지만,
내가 얼음이라는 생각을 놔버리면 태어나는 것도 없고 죽는 것도 없다.
나라는 존재는 그냥 이 우주의, 이 세상의 작디 작은 한 줄기의 흐름일 뿐이다.
'내 것'이라는 소유욕과 '내가 옳다'는 아집에 사로잡히기에 괴로움이 생긴다.
그런데 '나'라는 것 조차도 없는 데, 내 것이 어디 있고 내가 옳다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내 것을 놔버리고, 내가 옳다는 생각을 놔버리면 괴로움이 없어지고,
괴로움이 없어지면 행복은 자연스레 오는 법,
이 행복을 찾아가는 것이 깨달음의 길로 가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는 데, 옳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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