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1. 실천적 불교사상

[법륜스님의 '실천적 불교사상'] 제9강 존재의 실상

상원통사 2014. 5. 12. 20:36

천수경에 죄무자성 종심기란 말이 있습니다.

죄무자성 종심기(罪無自性 從心起) : 죄라는 것은 스스로의 성품이 없고, 마음을 따라 일어난다.

죄(罪, 죄는)  무(無, 없고)  자(自, 스스로의)  성(性, 성품이),

종(從, 따라서)  심(心, 마음을)  기(起, 일어난다)

 

죄라는 것은 우리들의 업, 업장을 말합니다.

‘너 죄지었다, 그래서 넌 지옥 갈거야’ 이렇게 말하지만

죄라는 것은 ‘이게 죄다’라고 할만한 스스로의 성품이 없다는 겁니다.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이렇게 살지, 죄가 정말 있는 거라면 우린 혼란스러워 못 삽니다.

 

언제는 죄 있다고 보안법으로 감옥에 집어넣고 사형언도를 하고,

무기징역 살았던 사람이 그걸 간판으로 내걸어서 국회의원이 됩니다.

일제시대 때 죄지은 사람, 동학꾼들이 해방되고 나니까 애국지사가 되었고,

그때 판검사하던 참 정의로운 사람들이 나중에 다 매국노가 되었습니다.

죄라는 게 정말 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없으니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좀 헷갈릴겁니다. 질문할 것도 많겠지만 조금만 더 갑시다.

여러분들이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고,

여러분들의 머리가 지금 혼란스러운 것이지 세상은 혼란스럽지가 않습니다.

세상은 바다에 파도가 물결치듯이 늘 그렇게 움직이는 겁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 마치 바닷가에 앉아서 파도 구경하는 것 같이 재미있는 데,

여러분들은 자기 생각에 빠져, 파도와 파도 사이에 빠져 살려달라며 허우적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혼란스럽고, 바다가 무섭고, 이 세상이 겁나고, 세상이 어떻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지요.

 

죄라고 하는 것은 죄라고 할 만한 종자, 씨앗, 근본 이런 게 없고, 어리석은 마음을 따라 일어난 것입니다.

어리석은 마음을 따라 일어났으니까 이 어리석은 마음이 사라져버리면 죄라는 것 또한 없어집니다.

 

심약멸시 죄역망(心若滅時 罪亦亡) : 만약 마음이 사라지면, 죄 역시 사라진다.

심(心, 마음이)  약(若, 만약에)  멸시(滅時, 사라지면),

죄(罪, 죄)  역(亦, 역시)  망(亡, 사라진다)

 

여기서의 마음이라는 것은 중생심을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자기의 죄, 즉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되려고 이 자리에 왔는데, 죄라는 게 본래 없다 하니까 기분 좋지요?

죄라는 것은 본래는 그 실체가 없지만 어리석은 마음을 따라서 생겨납니다.

여러분들이 어리석은 마음, 어리석은 생각을 갖고 있는 한 죄는 있는 것이고, 그 생각을 버리게 되면 사라집니다.

 

사람을 99명이나 죽인 앙굴리말라도 '천벌을 받는다, 절대로 해탈할 수 없다' 했지만 부처님의 한 말씀에 다 벗어버렸습니다.

사람을 99명이나 죽이고서 잘못했다고 뉘우쳤는데, 눈을 떠보니 그것이 꿈이었다면, 꿈에서 깬 뒤에는 죄의식을 안 갖겠지요.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가 새로운 사람이 된 줄을 모르고 돌로 쳐죽였습니다.

여러분들은 ‘돌맹이에 맞아죽었으니까 깨달아봐야 소용없네요’ 이렇게 말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눈곱만큼의 원망이나 두려움도 없이 그저 편안하게 기쁜 마음으로 열반에 든 겁니다.

자신의 어리석었던 인연이, 중생의 어리석음에 반영이 되어서 돌아온 과보를 그대로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은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 같지만 잘 살펴보면 쉽고 분명하고 우리 생활하고 직결된 이야기입니다.

불법(佛法)은 우리들의 삶을 떠나서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깨끗하다, 더럽다’, 이렇게 보통 말합니다.

이 깨끗하다 더럽다는 말은 위생적으로 깨끗하다 더럽다도 포함되지만,

반야심경에서 ‘깨끗하다’는 말은 ‘성스럽다’는 뜻이고, ‘더럽다’는 말은 ‘부정하다, 부정탄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볼 때 불상은 성스럽죠?

그 성스러움이 불상에 있습니까, 여러분 마음에 있습니까?

기독교인들이 와서 보면 부정타는 존재이고 재수없는 존재입니다.

똑같은 불상인데 여러분들은 꿈에 불상을 보면 재수있다 하지만 교인들은 재수없다고 합니다.

성스럽고 성스럽지 않음은 존재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에, 우리들의 생각에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존재 자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경을 낀 사람이 벽의 색깔은 파랗다 빨갛다 하는 것과 똑 같습니다.

 

근데 요즘에는 ‘그건 사람의 생각에 따라서 다른 거구나’ 라고 조금씩 알기 시작합니다.

왜 그럴까요? 다른 색깔의 안경을 낀 사람을 하도 많이 만나다 보니까,

‘이거 뭔가 좀 이상하다’ 이래서 안경을 벗으려는 시도를 하는 겁니다.

즉, 다른 문화, 다른 가치관을 만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근데 같은 색깔의 안경을 끼고 그 방 안에 계속 살면

저 벽 색깔이 파랗다 하는 거를 한 번도 의심 안 해보고 계속 살겠지요.

우리가 한국에 살면서 우리 모두가 동일한 가치관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마치 객관적인 진리인양 의심의 여지가 없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그게 그 사회에서는 진리가 됩니다.

 

인도에 사는 사람은 소고기 먹으면 큰일 나는 줄 압니다.

회교도에게 돼지고기를 베어서 강제로 먹이면 정말로 숨넘어 가버립니다.

그거 먹으면 자기는 영원히 하늘나라에 갈 수가 없기 때문에...

이런 것들은 그들이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지 그것이 객관적인 진실은 아니다 이겁니다.

 

그럼 객관적인 진실은 뭐냐? 그것은 텅 비어있습니다.

그것은 성스러움도 아니고, 그것은 부정타는 존재도 아닙니다.

성스럽다느니 재수 없다느니 할 만한 존재가 없다, 그것은 다 내 마음 가운데 있다,

이걸 탁 깨쳐버린 자는 영원한 부적을 한 장 가진 것과 같습니다.

 

근데 여러분들은 그게 있다고 생각하니까 매년 부적을 갈아야 되고,

벼락맞은 대추나무를 비싼 돈 주고 사야된단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부정타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왜? 일체가 다 마음이 짓는 바이니까.

 

그것을 놔버린 사람은 자유롭습니다.

뭘 먹든, 뭘 하든, 어디를 가든 그런 아무런 걸림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뭔가를 고집하고 있으면 어디는 가면 안되고,

어디가서 절하면 안되고, 뭐는 만지면 안되고, 뭐는 뭐하면 안되고 이렇게 됩니다.

 

똑같은 떡집에서 만들어 배달해 줬는데 장례집 떡은 부정타고, 불전에 올린 떡은 성스럽고,

불전에 올린 떡도 기독교인이 볼 때는 부정타고 이렇게 됩니다.

떡은 그냥 떡일 뿐입니다.

잔치집에 가서 떡 먹고, 절에 와서 배부르면 안먹어도 되고, 장례집에 가서 배고프면 또 먹어도 되고,

아침에 절에 가서 기도하고, 점심때는 손자 낳는 데 가서 도와주고,

저녁에는 장례집에 가서 도와주어도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인생이 자유로워집니다.

오늘 우리 애가 입시시험을 치고 있는 데, 친구 집에 누구 죽었다해서 가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가기 싫으면 안가도 됩니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자유가 있단 말입니다.

그 존재에게 있어가지고 그것이 나를 거부하고 나를 끌어당기고 이런 게 아닙니다.

그런 이치를 깨달으면 저절로 이렇게 훤한 길을 맘 놓고 가듯이, 자신이 선택해서 가는 겁니다.

이제까지 잘못생각 하고서, 얼마나 많은 속박을 받고 얼마나 많은 눈치를 보고 살았습니까?

 

연기(緣起) : 서로 연관되어 있고 변해 간다

이 세상의 참 모습은 서로 연관되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제법무아 제행무상' 이런 말이 나오는 겁니다.

‘이 세상은 서로 연관이 되어있고 변해간다’, 이것을 ‘연기’라 합니다.

부처님이 깨달았다는 것이 바로 이걸 깨달으셨다는 겁니다.

근데 중생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서로 연관되어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어떤 사물을 관찰할 때 그 어린아이처럼 순간적으로 보고 부분적으로만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면 어떻게 느끼겠습니까?

다리만 만져보고 기둥같다, 꼬리만 만져보고 빗자루 같다, 배만 만져보고 벽같다, 귀만 만져보고 부채같다,

부분적으로 보면 일리가 있지만 코끼리 모양하고는 전연 안 맞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가르침도 사실 부분부분 따져보면 다 일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전체라고, 자신이 겪은 경험을 전부라고 단정하고 거기 집착하기 때문에

어리석어지고, 전연 사실하고 맞지 않게 됩니다.

 

‘나는 좋은 일 하면 죽어서 천당에 갈거야, 그래서 나는 영원히 천당에서 살거야’,

이게 범부중생 생각의 가장 대표적인 증상인데, 이건 맞지가 않는 겁니다.

‘내가 천당에 간다’고 하는 데, ‘나’라는 게 누군지를 따져 물으면 '나'라는 것은 없습니다.

‘천당에 가서 영원히 있을거다?’,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이게 환상입니다.

 

‘존재 하나하나가 다 개별적인 존재다’, 라고 생각할 때

‘그 존재가 왜 생겼나’ 하고 물으면,

‘모르겠다, 아마 누가 만들었나 봐',

'누가 만들었을까? 만든 사람을 창조주라 하자’, 이렇게 됩니다.

 

얼음과 물이 따로따로라면 얼음을 만들고 물을 만들어야 되지마는,

얼음이 변해서 물이 되고 물이 변해서 얼음이 되는 것을 안다면 얼음과 물을 따로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물분자 H2O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하겠지만, 그것도 실체가 아닙니다.

산소와 수소가 만나면 물분자가 되고, 물이 분해되면 산소와 수소가 됩니다.

그럼 산소, 수소는 있어야 되지 않느냐 하지만,

양성자 하나, 전자 하나가 만나면 수소가 되고,

양성자 여덟 개, 중성자 여덟 개 전자 열여섯 개가 만나면 산소가 됩니다.

이 만물은 이렇게 서로 연관되어 있고, 단독자가 없으니까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반야심경 공부할 때 다시 공부합시다.

존재의 본질을 꿰뚫어 보면, '누가 만들었느냐, 누가 창조했느냐' 이런 생각이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그런 생각을 할 필요조차도 없습니다.

모르니까 '이게 왜 생겼을까, 틀림없이 누가 만들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누가’가 중요한 과제가 됩니다.

지금 제 얘기는 다른 종교를 비판하려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실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옳다고 믿는 것들을 그냥 옳으려니 생각하지 마시고 조금만 더 깊이 관찰해 보면,

마치 꿈속에 빠져 있는 것처럼 우리는 허상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두운 밤에 길을 헤매듯이 살고 있기 때문에, 잘되려고 열심히 살았는데 늘 이런 결과가 나옵니다.

그런 꿈은 분명히 꿈인 데, 현실과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현실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착각하는 이 세계는 실제의 세계와 떨어진 별개가 아니라 서로 관계가 있습니다.

마치 꿈은 환상이기는 하지만, 꿈은 우리들의 일상생활과 관계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진실의 세계도 환상(가상)의 세계, 현실의 세계라고 불리는 세계와 또 연관이 있습니다.

어떤 것도 별개로 존재할 수가 없다, 이게 불법(佛法)입니다. 다 연관이 되어 있어요

 

그런데 중생은 꿈을 꿈인 줄 알아야 되는 데 꿈을 현실로 착각한다는 겁니다.

여기 꿈이 있고 여기 현실이 있다면 현실과 꿈은 연관이 있습니다.

현실의 어떤 반영이 꿈으로 나타납니다.

진리의 세계로부터 드러난 어떤 반영물이 바로 현상이다,

바다로부터 파도가 일어나듯이, 바다를 떠나서 파도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바다를 보지 못하고 파도 하나하나만 보면, 파도가 생기고 사라지고 생기고 사라지고 이러지요?

그러나 바다 전체를 보면, 파도는 생기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만 물이 출렁거릴 뿐입니다.

부분만 보면 생멸관에 빠지지만, 전체를 보면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고 다만 물이 출렁거리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생에 두려움이 있는 것은 이 육신으로만 나를 삼기 때문입니다.

파도 하나를 나로 삼기 때문에 파도가 생기고 사라지지마는,

바다 전체를 보면 그건 생기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그냥 출렁거리는 것입니다.

이 육신 하나로 나를 삼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생사의 고뇌에 빠진다 이겁니다.

 

또 자기가 이렇게 한 생각에 빠지기 때문에 회의, 고뇌에 빠집니다.

한 발 물러서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꿈을 꿈인 줄 알게 되면 꿈 깨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꿈은 필요 없다, 꿈은 나쁘다, 꿈은 안 꿔야 좋다', 이런 말이 아니라

꿈을 다만 꿈인 줄 알면 꿈에 팔리지 않습니다.

꿈속에서도 꿈인 줄 알면 두려움이 사라지고, 깨고 싶으면 금방 깰 수도 있고,

더 꾸고 싶더라도 꿈인줄 알고 더 꾸면 재미가 있습니다.

이게 연극인 줄 알면 여러분들은 울고 불고를 마음껏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게 꿈인 줄 알면 여러분들은 마음껏 꿈을 즐길 수 있다 이말입니다.

근데 여러분들을 꿈인 줄 모르기 때문에 쫒기고 괴로워 할 수밖에 없어요

 

마지막으로 합장하시고 사홍서원을 같이 하겠습니다.

 

사홍서원(四弘誓願)

이 땅에 고통받는 중생이 한 사람도 없는 정토세계를 이루겠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괴로움과 번뇌가 일어나지 않도록 수행정진하겠습니다.

부처님 법 만난 것을 기뻐하며 모두 배우겠습니다.

일체 중생과 더불어 꼭 성불하겠습니다.

 

 

이 강의는 '정토회 > 정토TV > 법문 보기 > 실천적 불교사상'에서  동영상으로 볼수 있습니다.

 

 

   *** 짧은 생각 ***

 

부처님의 말씀 중 이런 대목이 있네요, 참 겸손하셨던 분 같습니다. 

"나는 이 네 가지 법을 다른 이로부터 듣거나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요,

 세상의 법을 수선하여 이치대로 관찰하므로써 지혜가 생기고 눈이 트여서

두루 갈 길 살핌으로서 지혜가 열려서 광명을 얻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