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1. 실천적 불교사상

[법륜스님의 '실천적 불교사상'] 제14강 승보에 대하여 - 첫 번째

상원통사 2014. 6. 4. 23:03

오늘은 삼보 가운데서 승보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프린트물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여섯 가지 화합하는 법

부처님은 다시 여러 비구들을 모이게 한 다음 여섯 가지 화합하는 법을 말씀하셨다.

여기 기억하고 사랑하고 존중해야 할 여섯 가지 화합하는 법이 있다.

이 법에 의지하여 화합하고 다투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첫째, 같은 계율을 같이 하라.

둘째, 의견을 같이 맞춰라.

셋째, 받은 공양을 똑같이 수용하라.

넷째, 한 장소에 같이 모여 살아라.

다섯째, 항상 서로 자유롭게 말하라.

여섯째, 남의 뜻을 존중하라.

 

부처님은 이튿날 아침 코삼비에 들어가 걸식을 마치고 비구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대중이 화합하지 못할 때는 저마다의 행동을 더욱 삼가야 한다.

 법답지 못하고 친절하지 못한 일이 있을 때는,

 참고 견디며 자비스런 마음으로 법답고 친절한 일이 행해지도록 힘써야 한다.

 물과 젖이 합한 것처럼 한 자리에 화합해서 한 스승의 법을 배우면서 안락하게 지내야 할 것이다.

 여러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여래의 계율을 따라 머리를 깎고 출가한 사문이 아닌가!

 아무쪼록 잘 참고 견디며 자비에 의해 밝게 화합해야 한다.

 부디 다투지 마라, 이 이상 화합을 깨트리지 말아라.”

 

이 글은 부처님이 생존해 계실 당시에 코삼비에 살고 있는 스님들이 계율문제를 가지고,

두 사람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서, 이것이 다시 패가 형성이 되어 크게 분쟁이 생겼습니다.

부처님께서 승가는 청정하고 화합해야 한다.’ 하고 간곡하게 화합하는 여섯 가지를 말씀하셨지만,

그 비구들은 이미 자기 견해에 사로잡혀서 부처님의 말씀마저도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부처님, 이것은 저희들의 일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가만히 계십시오. 저희들이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하면서 당신은 계율을 어긴 것이다’, ‘나는 계율을 어긴 적이 없다하고, 계속 다퉜습니다.

아무리 말려도 안되자 부처님께서는 그 곳을 떠나서,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홀로 정진하고 계셨습니다.

처음에 재가신자들은 부처님께서 말없이 떠나신 이유를 몰랐는 데,

나중에야 스님들끼리 서로 다퉈서 부처님께서 떠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재가신자들은 이렇게 화합하지 않는 승단에는 보시를 할 필요가 없다’,

하여 모든 신도들이 일체 코삼비 비구들에게 공양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탁발을 하러 가도 아무도 공양을 주지 않으니, 아무리 고집 센 사람도 밥 굶고는 살 수가 없지요.

매일 매일 공양을 얻어먹어야 되는 데, 배가 불러야 싸우지 배고픈데 싸울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결국 그들은 다툼을 멈추고 부처님이 계시는 곳까지 참회를 하러 갔습니다,

 

스님들끼리 싸울 경우, 여러분들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에이, 교회나 가버려야 되겠다’, 이렇게 하겠습니까, 부처님 당시의 재가신자들처럼 하겠습니까?

부처님 당시의 재가신자들처럼 해야 되지만, 여러분들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 여러분들은 불법을 위해서, 스님들을 위해서 보시한 게 아니고,

복을 얻기 위해서 투자를 한 것이기 때문에... 아시겠어요?

주식을 사는 것처럼 은행에 이자를 받기 위해서 예금하는 것처럼, 자기의 어떤 이익을 위해서 보시를 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이 사태를 멈출 수 있는 재가자의 어떤 힘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기복불교는 스님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들에게도 문제가 있고,

불교계의 다툼은 우리들이 절에 다니는 목적이 잘못되어 그것의 쌓이고 쌓임이 원인인 것이지,

여러분들을 떠나서 스님들만의 잘못으로 다툼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신다면 좀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다같이 반성을 해봐야 됩니다.

 

오늘은 승단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 부분만 별도로 떼서 경전에 있는 내용을 갖고 자세히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상가는 청정하고 화합해야 한다.

상가(승단)는 청정하고 화합해야 한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두 가지를 말씀하셨어요. 청정하고 화합해야 한다.

 

청정이란 계율(戒律)을 잘 지킨다는 말입니다.

상가에 소속된 그 구성원들은 그 조직이 갖고 있는 규칙을 잘 지킬 때 청정하다고 말하고,

그 규칙을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 하면 부정하다, 부패했다, 청정성을 잃었다, 세속에 물들었다, 이렇게 말합니다.

 

무소유적 가치관 : 세상 만물은 누구의 것도 아니다. 단지 필요에 의해 쓰여져야 한다.

이 청정은 특히 재물에 있어서 청정해야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 가장 중요한 근본 중의 하나가 무소유입니다.

무소유라는 것은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고, ‘누구의 것도 아니다는 말입니다.

어떤 물건을 갖고 있느냐 안 갖고 있느냐, 적게 갖느냐 많이 갖느냐, 이것이 근본이 아니고,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물건도 누구의 것이 아니다, 누구의 소유도 될 수가 없다는 것이 무소유입니다.

하늘에 빛나는 태양이 누구의 것도 아니고, 별이 공기가 흐르는 물이 누구의 것도 아니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세상 만물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이게 무소유입니다.

누구의 것도 아니니 누가 써도 좋고, 누가 써도 좋은 데 필요로 하는 사람이 쓴다,

그래서 이 세상의 만물은 필요에 의해서 쓰여져야 합니다.

 

이게 약이다하는 물질이 있을까, 아픈 사람이 먹어서 나으면 그것을 약이라 이름할까요?

아픈 사람이 먹어서 병이 나으면 그걸 약이라 이름하고,

멀쩡한 사람이 그걸 먹고 병이 들면 독이라 이름합니다.

 

어린아이의 엉덩이로부터 툭 떨어진 노란 물건이 있습니다.

이게 방안에 있을 때는 오물이라 이름하고, 밭에 가면 거름이라 이름합니다.

또 허리를 다친 사람이 똥물이나 똥떡을 만들어 먹을 때는 약이라 이름합니다.

그것이 오물일 때 똥이라 하고, 밭에 가면 거름이라 하고, 병이 났을 때는 약이라 이름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누구의 것이 아니고, 세상 만물은 필요에 의해서 쓰여져야 합니다.

약은 아픈 사람이 먹어야 하고, 건강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돈 있다고 건강한 사람이 먹고, 돈 없다고 아픈 사람이 못 먹는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이 먹어서 건강해 질 수 있는 것이 음식이고, 먹고서 병들면 독입니다.

배고픈 사람이 먹어야 하는 데는 이유가 없습니다.

너는 북한사람이니까, 너는 빨갱이니까 먹지마라, 이런 것은 법의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공기는 숨 쉬는 데 필요하고, 누구나 다 숨 쉴 수 있습니다.

너는 오늘 나쁜 짓 했으니까 숨 쉬지 마, 이렇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햇볕은 누구의 것도 아니기 때문에 누구나 필요한 사람은 다 쬘 수가 있고,

공기는 누구의 것도 아니기 때문에 누구나 다 숨 쉴 수가 있고,

음식도 누구의 것도 아니기 때문에 배고픈 자는 다 먹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게 원래의 만물의 이치입니다.

 

이 법당이 법륜스님 것이라면, 이 법당 안에 있는 공기도 법륜스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두 시간이나 숨을 쉬고 있으니 저한테 감사하다고 해야 할 것인 데,

여러분들이 저에게 고맙다는 말도 안하고, 저도 여러분들을 살려주었다는 생각을 안하는 이유는,

공기를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공기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라고 진리대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무소유의 진리를 체득하면 저절로 청정해집니다.

청정하다는 계율을 잘 지킨다는 의미도 있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무소유의 정신을 갖고 있습니다.

즉 무소유는 내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이런 말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내게 보관하고 있으라고 했을 경우엔, 내가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내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돈을 많이 벌어서 아무리 부자라 하더라도 그건 여러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행자라면 그 재물이나 돈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여러분들에게 보관시킨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줘야 합니다.

주는 게 아니라 나눠서, 필요한 사람이 쓰는 겁니다.

그런 마음으로 줄 때 이것을 무주상 보시라 말합니다.

 

금강경에 보살은 복을 짓지만 복을 받지 않는다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복을 지을 때는 복받으려고 짓지, 복 안받을 바에야 복 지을 이유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복을 탐하지도 않고 복을 받지도 않는다(불수불탐)’라고 그러느냐,

그것은 본래 내 것이라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승가는 이런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어야 됩니다.

재물이나 지위에 대한 욕심을 갖고 있다면, 이것은 기본적으로 승가의 구성요소에서 자격이 미달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청정해야 되는데 청정하지 못했을 때는 참회를 해야 합니다.

사람이란 욕심을 낼 때도 있고 계율을 어길 때도 있는 데, 이럴 때는,

제가 깜빡 했습니다. 갑자기 어리석은 생각이 나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이렇게 참회를 해야 됩니다.

잘못은 누구나 다 저지를 수가 있고 그것은 출가한 승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수행자라면 잘못인 줄 빨리 깨닫고, 잘못인 줄 알았을 때는 뉘우쳐 참회할 줄 알아야 됩니다.

잘못인 줄도 모르거나, 잘못인 줄 알아도 참회할 줄도 모른다면 그것은 범부나 아무 다름이 없습니다.

 

승가는 포살과 자자로 스스로를 청정하게 한다.

스스로 , 내가 잘못했구나이렇게 뉘우치는 것을 보통 참회(懺悔)라고 하고,

제가 이 일은 잘못했습니다’, 라고 구체적인 계율에 따라

자신의 잘못을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참회하는 것을 포살(uposatha)이라 합니다.

또 내가 잘못하고서도 뭘 잘못했는지를 모르고 있을 때,

도반이 지적을 해줘서 잘못을 깨닫는 수행법을 자자(自恣)라 합니다.

 

승가는 반드시 보름마다 계율을 두고 포살을 해야 하고,

삼 개월 안거가 끝날 때는 대중이 다 모여서 자자를 행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승가는 청정성을 훼손시킬 수도 있지만, 보름마다 포살을 통해서, 일 년에 한 번씩 자자를 통해서,

그 훼손된 부분을 청정하게 도로 복귀시켜 늘 승가를 청정하게 만듭니다.

 

스님들이 법회를 할 때는 반드시 포살을 해서 스스로를 먼저 청정하게 한 다음에 하는 것이지,

자신의 더러운 것을 씻어 내지도 않고서는 대중 앞에 나서서 법회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초하루나 보름마다 모여서 승가는 포살을 행하고, 그날 대중은 승가에게 공양을 올리게 됩니다.

 

 

(제15강에 계속합니다~~)

 

이 강의는 '정토회 > 정토TV > 법문 보기 > 실천적 불교사상'에서  동영상으로 볼수 있습니다.

 

 

*** 짧은 생각 ***

 

서로 자기가 맞다고 우기는 것은 부처님 계실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