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의 법문/1. 실천적 불교사상

[법륜스님의 '실천적 불교사상'] 제16강 승보에 대하여 - 세 번째

상원통사 2014. 6. 15. 21:30

(~~15강에서 계속)

 

셋째, 보시물은 똑같이 나누어라

지금도 그렇지만 부처님 당시에 스님들은 탁발을 해서 먹고 수행을 했습니다.

탁발을 나가면 많이 얻은 사람도 있지만 적게 얻은 사람, 못 얻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받은 걸 그 자리에서 먹는 게 아니라 본래 자리로 돌아와 다시 조정합니다.

많이 얻은 사람은 적게 얻은 사람, 못 얻어온 사람, 또 환자와 같이 탁발 못나간 사람들에게 덜어줍니다.

이렇게 보시물은 다 같이 나눠 먹습니다,

왜 그럴까? 누구의 것도 아니고 필요한 사람이 먹고, 필요한 사람이 쓰는 것이니까...

보시물을 평등하게 나누는 데, 평등하다는 말은 너도 하나, 나도 하나이런 개념이 아니고,

필요로 하는 사람이 쓰는 게 불가에서의 평등의 개념입니다.

 

키가 크고 덩치가 큰 사람은 밥을 좀 많이 먹고, 어린아이는 좀 적게 먹어도 되고,

어른은 하루 한 끼 먹지만 어린아이가 자랄 때는 두 끼 세 끼 먹어야 됩니다.

형편에 맞게 먹는 게 평등한 것이지, 똑같이 한 끼 먹거나 똑같은 양을 먹는게 평등이 아닙니다.

 

점심 발우공양 때도 평등공양을 하는 데, 똑 같은 양으로 일단 한 주걱씩 퍼줍니다.

그리고 남는 것을 내려 보내면, 더 먹고 싶은 사람은 더 먹어도 됩니다.

사람이 열 명이 있는 데 물건이 열다섯 개가 있다면,

하나씩 쭉 돌리고 나머지 다섯 개는 더 필요한 사람이 가져가도록 하는 방식입니다.

이게 경제적인 평등입니다.

 

가진 자는 많이 가지고 없는 자는 없고, 이렇게 되니까 이 사회가 갈등이 생깁니다.

사회의 온갖 갈등이 빈부격차가 심해서 그런 겁니다.

한쪽에는 굶어죽고 한쪽에는 음식이 썩어 나가고, 지금 이런 문제잖아요.

 

이것이 오늘날의 용어로는 평등주의라고 말할 수 있고 사회주의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사회주의는 원래 평등하게 나눠 쓰자는 데서 나왔습니다.

그 나누는 것을 독재로 해서 나누자 하는 게 공산주의입니다.

민주적으로 의논하고 서로 의견을 맞추어서 나누는 게 사회 민주주의, 즉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입니다.

오늘날 사회주의는 망한 게 아닙니다.

영국이나 독일이나 EU라고 말하는 유럽공동체 대부분의 경제체계가 사회주의입니다,

 

이런 정신은 부처님의 상가에서 이미 이천 육백년 전에 다 이루어졌던 것이고,

그것이 또 대대로 전수되어 내려왔던 것입니다.

 

우리 절에 오십 여명이 살면서 다 나름대로 각자의 역할을 하고 사는 데,

대중 앞에 얼굴을 내밀고 이렇게 법문이나 하고 인사나 받고 하는 건 주로 법륜스님이 합니다.

그러니까 저한테는 선물이 많이 들어오고, 제 방에는 늘 먹을 것, 입을 것, 좋은 것 많이 있습니다.

근데 부엌에서 공양 짓거나 저 뒤에서 청소하는 사람은,

누가 양말하나 갖다 주는 사람없고, 수고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사실 거기서 밥 짓고 청소하고 이런 사람에 의해서 이 절은 유지가 되는데도 그렇습니다.

월급이라도 많이 주면 월급 때문에라도 살지만, 이 절에는 월급도 없습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좋다고 들어왔지만 살면서 불만이 생기고, ‘그래, 너 혼자 다해먹어라이러고 가버립니다.

 

이렇게 들어오는 물건은 이 정토회에서 내가 맡은 역할 때문에 나에게 오는 것이지 내가 잘나서 오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돈은 사무처에서 모으고, 물건은 모아놨다가 일정한 수가 되면 하나씩 나눕니다.

 

개인이 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잣집 아들이나 부잣집 딸은 부모가 와서 호주머니에 뭘 자꾸 찔러주고 갑니다.

그걸 갖고 혼자서 커피도 마시고 또 뭐도 쓰고 용돈을 펑펑 쓴다하면 화합은 깨집니다.

그래서 세속 가족이 개인에게 준 것마저도 모아서 같이 씁니다.

 

부모가 돌아가신 사람은 스님이 재()를 지내주면 법주스님한테 봉투를 드립니다.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개인이 갖지만, 여기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청소하고 어떤 사람은 전화받고 어떤 사람은 뭐 하듯이,

그 스님은 목탁치는 역할을 한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 여기서는 신도님이 낸 거는 사무처로 들어가고,

집에서 오거나, 강의료를 받거나 TV 출연료를 받으면 다 모아서, 내부의 약값으로 쓰든지 이렇게 합니다.

균등하게 이렇게 나누면 불화가 없지만 그렇지 않으면 불화가 생깁니다.

 

제가 이렇게 법문하면 여러분들은, ‘우리나라 스님들이 이래야 되는 데, 조계종도 이래야 되는 데이 생각만 하지요?

그러면서 우리 집이 이래야 되는 데’, 이 생각은 안 합니다.

그러니까 법문을 들으면 내가 이렇게 해야 되겠구나이렇게 생각은 안하고,

법문을 들으면서 우리 남편이 저 얘기를 들어야 되는 데’,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아무리 좋은 법문을 들어도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겁니다.

 

부처님의 법문은 내가 어떻게 할거냐’, 이 것입니다.

부처님이 이렇게 가르쳤으니, 너는 이렇게 해라’, 이것은 불법이 아닙니다.

 

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우선 나부터 우리 가정부터 먼저 한 번 해보자,

가정에서 잘되고 나서, 회사나 직장이나 신도회로 확대해 가보면 되겠지요?

근데 자기는 빼고 늘 다른데 가서 부처님이 이랬는데, 스님은 왜 이거 안 지킵니까?’ 이럽니다.

그러니까 스님들이 신도들 공부시켜놓으면 골치만 아프다이럽니다.

 

에 의해 통치가 되고, 모든 국민이 똑같은 권리를 갖고 의견을 맞추고, 경제적인 평등을 지향하는,

이것이 현대 사회가 갖춰야 하는 세 가지 요인이고, 이게 잘 갖춰진 나라가 바로 선진국입니다.

이게 다 불법 안에 있습니다,

괜히 법조문을 많이 만들 필요가 없고, 이 세 가지만 잘 지켜져도 나라가 조용할 겁니다.

 

넷째, 같은 장소에 모여 살아라

이게 아마 이해 안 될 수가 있는 데, 이것은 사적으로 흩어지지 말고 공동체를 형성하라는 것입니다.

사적으로 흩어져 사는 것은 서로 경쟁하고, 승리하고 패배하고, 성공하고 실패하는 삶이고,

공동체라는 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돕는 관계다’, 이 말입니다.

 

여러분들 가족은 공동체이고, 공동체 안에서는 네 것 내 것이 없습니다.

자식들이 잘되는 게 부모가 잘되는 것이고, 남편이 잘되는 게 아내가 잘 되는 길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가족 안에서도 서로 자기를 세우니까, 남편이 잘되는 게 아내가 잘못되는 그런 경우가 생깁니다.

근데 진정한 공동체가 되면 이게 누구의 것도 아니고

그 전체의 필요에 의해서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에게 좋은 것입니다.

 

모여 살아라’, 이 말은 옛날에는 정말 다 볼 수 있는 한 울타리에 모여살라는 얘기였고,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각자 자기가 사는 삶의 정보를 다 공개하고 살아라’, 이 말입니다.

요즘 유식한 말로 하면 투명성입니다, 돈을 어떻게 썼는지 훤히 보여야 되겠지요,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뭐 먹는 지, 어떤 사람이 주로 오는 지,

모여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 지, 이런 것들을 국민이 알 권리가 있습니다.

이게 투명성이고, 이게 같이 사는 것입니다.

정보를 소수의 사람만이 움켜쥐고 비밀주의로 하면 한 사람이나 한 집단에게만 이롭지만,

전부 다 공개가 되면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공동선이 남게 되는 겁니다.

 

인류의 양심이란 공동선이란 말인데 언제 어떻게 생겼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인류학적으로 따지면 구석기 시대, 즉 원시 공산체제 시대에,

인류는 30여명 정도 무리지어 짐승처럼 몰려다니는 생활을 백만 년 동안이나 했습니다.

그 때엔 서로가 다 보고 살았기 때문에 모두에게 이로운 것만이 선이 되고 후손에게 전수가 되었습니다.

모두에게 이로운 것만이 다른 사람에게 전수가 되고 그렇지 않는 것은 전달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류의 양심은 그런 조건에서 생긴겁니다.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라,

즉 정보를 공개해라, 비밀주의로 살지 마라,

그러면 모두에게 이로운 것이 선이 되는 그러한 가치관이 형성될 것입니다.

 

다섯째, 서로 자비롭게 말하라

아무리 그 사람이 나를 위해 좋은 일을 해 줘도 말을 잘못하면 복 다 까먹습니다.

돈을 백만원 주면서 아이구, 거지같이 맨 날 이래 얻어 먹고나 살아라,’ 이렇게 하면 받으면서도 기분이 나쁘겠지요.

그러니 앞의 것을 다 지킨다고 해도, 서로 말을 사납게 하고 욕설을 하고 비난을 하게 되면 불화가 생깁니다.

말을 자비롭게 하려면 자비심이 있어야 되고, 사랑이 담겨 있어야 되는 데,

정말 자비로운 말이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나오려면, 상대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해 위에 선 사랑이라야 진정한 사랑이지, 이해없는 사랑은 맹목적 집착입니다.

 

내가 싫다는데도 나를 좋다고 따라다니는 것은, 나를 이해하지 않고 덤비는 것이기에 사랑이 아니라 괴롭히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자식을 사랑하는 것도, 아내나 남편을 사랑하는 것도 대부분 이해를 기초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뜻대로 될 때는 사랑이고, 자기 뜻대로 안되면 미움이 되는 겁니다.

()가 증()이 된다는 것은, 애나 증이나 다 똑같이 집착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식대로 되면 좋아하고 자기식대로 안되면 미워하는게 아니라,

자기 식대로 하겠다는 걸 놓아버리고, 타인을 이해하는 위에서 사랑을 해야 그것이 증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북한에 뭘 보낼 때, 정말 북한사람이 굶주리는 것을 같이 아파하고 눈물 흘리면서 보내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15만톤 주고 뺨때기 맞았다고 엄청나게 화를 내고, 봉쇄정책을 쓰고 압박정책을 쓰는 겁니다.

자기 식대로 자기만족을 위해서 눈물 흘리고, 자기만족을 위해서 주고, 자기만족을 위해서 화를 내고 이럽니다.

그쪽 아픔의 이해 위에서 여러분들이 사랑을 베풀면 이것이 증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설령 잠수함을 보내고 무장간첩이 침투했다 하더라도, 역시 민중은 굶어죽고 있습니다.

내가 보낼 때는 굶어죽는 사람을 위해서 보냈지 군인을 위해서 보낸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군인이 내려오면 막고, 잠수함이 내려오면 잡되, 배고픈 사람에게 주는 것은 주어야 합니다.

근데 우리는 그렇게 안합니다.

우리가 이해를 기초로 하지 않는 사랑을 하기 때문에 늘 증오심으로 바뀌게 됩니다.

 

여섯째, 남의 뜻을 존중하라

남의 뜻을 존중하라는 것은 의견을 맞추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는 데, 좀 다릅니다.

의견을 맞추는 것은 의견이 서로 다를 때 어떤 것이 더 나은 의견일까를 연구하고 토론하면서 맞춰 나가는 것이고,

남의 뜻을 존중하라는 것은 상대방이 틀렸든 옳든 그 사람을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는 이 여섯 번째가 제일 잘 안됩니다,

예를 들어 여기서 어떤 일을 할 때, 행자님들이 스님 이러면 어떨까요이렇게 의견을 냈는데,

내가 만약 치워라, 니 대학이나 나온 것이 생각이 그거밖에 안돌아가나이렇게 말한다면,

스님 말을 들어보니 자기 의견이 틀리긴 틀렸어도 엄청 기분이 나쁩니다.

? 존중받지 못하고 무시받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 뜻을 존중해주라는 겁니다.

 

옳고 그르다고 하기 전에,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런 생각이 들고 그런 견해가 생겼으니까 그렇게 말을 했을 것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하고 받아들이고 존중해주다가, 잘못됐다 싶으면 이래이래 잘못됐다고 지적을 해야 됩니다.

근데 보통 우리는 살면서 안그렇습니다.

경험이 많고 지위가 높고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짜식, 되지도 않을 소리하고 있네’, 이렇게 나가기가 쉽습니다.

 

제가 전에 부부를 상대로 조사도하고 상담도 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남편들에게, ‘자기 아내가 뭘 해주기를 제일 원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남편들은 대부분 '돈'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부인들의 다수 의견은 돈이 아니라, 자기를 '한 사람으로 존중해주기'를 원했습니다.

자식이 있는 앞에서 무시당했을 때 가장 섭섭하고, 제일 가슴에 상처가 컸다는 겁니다.

자식들하고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아내가 뭐라할 때, ‘니가 뭘 알아!’ 이렇게 했을 때 가장 상처가 많고 섭섭하더라는 겁니다.

여기 앉아있는 거사님들은 이해가 잘 안되겠지만, 아이들에 있어서 엄마는 부처님이며 하느님이며 스승이며 모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 앞에서 엄마가 아무 것도 아니다는 식으로 밟아버렸을 때 가장 상처가 큰겁니다.

 

사람들은 다 자신이 부족한 줄은 알지마는 그래도 일정한 존중을 해주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존중 해주지 않으면 불만이 생기고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이렇게 여섯 가지 중 뭔가가 지켜지지 않고 있다 하면 지금은 조용할지 몰라도 나중에는 불만과 불화가 생길 것입니다.

또 지금 불화가 생기고 있다면 이 여섯 가지 중에 몇 가지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이니,

화합해라, 화합하자고 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이 여섯 가지 중 지켜지지 않는 부분을 지켜 나가도록 서로 애를 쓰면 저절로 화합이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고, 그 분의 가르침은 분명하고 쉽습니다.

그러니 괜히 법조문 많이 만들지 말고 여섯 개라도 제대로 지키면 나라도 편안할 것이고,

여러분들 가정에도 이 여섯가지 조문을 지키도록 노력을 해보고,

저희 정토회 등 모든데서 지키도록 애써가는 과정에서, 상가 즉 공동체는 청정하고 화합할 것입니다.

 

한 번 더 읽읍시다.

 

부처님은 다시 여러 비구들을 모이게 한 다음 여섯가지 화합하는 법을 말씀하셨다.

여기 기억하고 사랑하고 존중해야 할 여섯 가지 화합하는 법이 있다.

이 법에 의지하여 화합하고 다투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첫째, 같은 계율을 같이 하라

둘째, 의견을 같이 맞춰라

셋째, 받은 공양을 똑같이 수용하라

넷째, 한 장소에 같이 모여 살아라

다섯째, 항상 서로 자유롭게 말하라

여섯째, 남의 뜻을 존중하라

 

부처님은 이튿날 아침 코삼비에 들어가 걸식을 마치고 비구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대중이 화합하지 못할 때는 저마다의 행동을 더욱 삼가야 한다.

 법답지 못하고 친절하지 못한 일이 있을 때는 참고 견디며 자비스런 마음으로 법답고 친절한 일이 행해지도록 힘써야 한다.

 물과 젖이 합한 것처럼 한 자리에 화합해서 한 스승의 법을 배우면서 안락하게 지내야 할 것이다.

 여러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여래의 계율을 따라 머리를 깎고 출가한 사문이 아닌가

 아무쪼록 잘 참고 견디며 자비에 의해 밝게 화합해야 한다.

 부디 다투지 마라, 이 이상 화합을 깨트리지 말아라."

 

 

이 강의는 '정토회 > 정토TV > 법문 보기 > 실천적 불교사상'에서  동영상으로 볼수 있습니다.

 

 

*** 짧은 생각 ***

 

부처님 말씀 10%만 따라도, 이 세상은 전혀 달라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