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둘레길

[북한산 둘레길] 20구간 - 왕실묘역길

상원통사 2014. 5. 29. 21:39

"왕실묘역길 : 역사와 문화의 숨결을 느끼며 바쁜 일상에 쉼표를 찍다! "가 아니고,

"역사와 문화의 숨결을 느끼며 둘레길 마지막 구간의 마침표를 찍다! "

우린 북한산 둘레길 중 마지막 남은 왕실묘역길은 걷습니다.

 

20구간 왕실묘역길

"성종의 맏아들로 중종반정 때 폐왕된 연산군의 묘와,

 세종대왕의 둘째딸로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기여한 정의공주의 묘가 있어 왕실묘역길이라 이름지었습니다.

 귀중한 역사자료인 왕실묘역뿐 아니라 600년 전부터 주민들의 식수로 이용되어 온 원당샘과

 서울시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로 수령 830년에 달하는 방학동 은행나무,

 연산군묘재실 등이 있는 왕실묘역길은 짧은 구간이지만 우리의 삶과 이야기를 알차게 담은 역사 문화길입니다."

 

왕실묘역길은 정의공주묘에서 우이우이령길 입구까지의 구간입니다.

거리는 가장 짧아 1.6Km 밖에 안되고, 걷는 시간도 약45분 밖에 안걸리는, 난이도 '下'의 가장 쉬운 구간입니다.

이곳까지 오는 교통편은

정의공주 묘는 쌍문역 3번 출구에서 130번 버스를 타고 연산군·정의공주 묘에 내려 3분정도 걸으면 되고,

우이우이령길 입구는 수유역 3번출구에서 120번, 153번을 타고 우이동 성원아파트에 내려 3분만 걸어오면 됩니다.

 

<우린 방학동길에서 오는 길이기에, 이 문을 통과하면서부터 시작합니다.>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

  철문이 닫혀있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정의공주(貞懿公主)

"세종대왕의 둘째 딸이며, 문종의 여동생이자 세조의 누이.

 훈민정음 창제에 왕세자였던 문종과 함께 많은 기여를 했다고 하며,

 세종대왕은 당시 정의공주 집에서 자주 기거했다고 합니다.

 세종대왕은 정의공주에 대한 총애가 남달라,

 정의공주의 자녀 4남2녀 중 4남에 대하여 친히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죽산안씨대동보(竹山安氏大同譜)의 기록

 '世宗憫方言不能以文字相通 始製訓民正音 而變音吐着 猶未畢究

  使諸大君解之 皆未能 遂下于公主 公主卽解究以進 世宗大加稱賞 特賜奴婢數百口'

"세종이 우리말과 한자가 서로 통하지 못함을 딱하게 여겨 훈민정음을 만들었으나,

 변음과 토착을 다 끝내지 못하여서 여러 대군에게 풀게 하였으나 모두 풀지 못하였다.

 드디어 공주(정의공주)에게 내려 보내자 공주는 곧 풀어 바쳤다'

 세종이 크게 칭찬하고 상으로 특별히 노비 수백을 하사하였다."

 

<정의공주님 아니었으면,

  한자라곤 이름 석 자밖에 쓸 줄 모르는 나는 정말 큰일날 뻔 했습니다.> 

 

 

<정의공주 묘역을 나와 동네를 지나 조금만 더 가면~~>

 

 

연산군 묘(燕山君 墓)

"이곳은 조선왕조 제10대 임금이었던 연산군과 왕비였던 거창 군부인 신씨 등이 안장된묘역이다.

 연산군은 성종의 큰 아들로 태어나 19세에 임금이 되었다.

 젊은 임금이었지만 붓글씨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어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그러나 두 번씩이나 사화를 일으켜 조정을 어지럽히자 신하들은 왕위를 박탈하여

 연산군으로 강등시키고 강화도로 추방하였으며, 중종 임금을 새로 추대하였다.

 그 해에 연산군은 병이 들어 강화도에서 31세로 일생을 마쳤는 데

 7년 후 부인 신씨의 요청으로 묘소를 이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연산군 묘가 나오는 데, 맨 아랫쪽은 연산군의 사위와 딸의 묘소이고~~>

 

 

<맨 위에 연산군과 부인 신씨의 묘가 있습니다.

  붓글씨도 잘 쓰고 시도 잘 짓는 똑똑한 사람이었다는 데,

  부인 아니었으면 묏자리도 없는 희대의 또라이였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변했을까, 어떻게 세상을 그렇게 지옥의 앞마당으로 만들수 있었을까,

  역사적 관점이 아니라, 정신의학적 관점에서 분석이 필요합니다.>

 

 

방학동 은행나무

"서울시 지정보호수 제1호로 지정된 방학동 은행나무는 높이 24m, 둘레 9.6m,

 수령 830년 된 (지정일자 : 1968년 2월 26일) 서울시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다.

 이 은행나무는 그 모습이 매우 고상하고 아름다우며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신성시 하였고,

 이 곳에 불이 날 때마다 나라에 큰 변이 생겼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일년 전에도 불이 나서 소방차가 동원되어 진화했다고 한다."

 

 

 

원당샘

"원당샘은 수백년 동안 마을사람들의 식수로 이용되었으며, 일명 '피양우물'이라고 불리워졌다.

 이 우물은 풍부한 수량으로 심한 가뭄에도 마른 적이 없고,

 일정한 수온을 유지하여 혹한에도 얼어붙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물이 잘나와 동네사람들이 줄서서 받아가고 있는 데, 물맛도 좋습니다.>

 

 

<원당샘과 방학동 은행나무, 그리고 연산군 묘를 어울어

  2011년 자연친화적 공원을 만들었답니다.

  제자리에 서서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빙 돌아봅니다.>

 

 

 

 

 

<원당샘을 지나 산길을 조금 오르니~~>

 

 

<뗏장 하나 없는 민둥 무덤이 나옵니다.

  무덤 앞 자그마한 비석을 보니 정경부인의 묘라 적혀있습니다.

  살아생전엔 누구도 부러울 것 없는 힘있고 호사스런 생활이었겠지만,

  지금은 잔디 한 포기 없는 무덤의 주인이라니...>

* 정경부인(貞敬夫人) : 조선시대 정·종(正·從) 1품 문·무관(文武官)의 처에게 내려졌던 최고의 봉작(封爵) 

 

 

<왕실묘역길은 워낙 짧은 구간이라 조금 더 걸으니~~>

 

 

<산길은 끝이 나고~~>

 

 

 

<이젠 아쉽지만 쌩쌩거리는 자동차들 옆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걷다보니 낯익은 우이천(우이동 계곡)이 보이고~~>

 

 

<우린 둘레길 걷기를 시작했던 제1구간 소나무숲길의 시작점 우이우이령길 입구 왔습니다.

  드디어 1년여에 걸쳐 북한산 둘레길 스물 한 구간을 모두 걸었습니다.

  멀리엔 북한산이, 가까이엔 공사현장이 보이는 오늘 이 자리는 ~~>

 

 

<13개월 전 작년 4월엔 이런 모습이었답니다.>

 

 

<카메라 들고 남 앞에 나서기가 조금은 쑥쓰러웠던 때,

  '함께하는 공정여행' 회원들과의 만남도 조금은 어색했던 때,

  둘레길 21구간을 완주하리라는 확신도 없이 그냥 따라가던 때,

  카메라 앞에만 서면 표정이 굳어져 사진찍기를 싫어하던 때,

  바로 둘레길 걷기를 시작했을 때의 이런 모습에서~~>

 

 

<1년여 만에 이렇게 변했습니다.

  배만 쪼끔 들어가면 금상첨화인데.... ㅎㅎㅎ>

 

 

<아홉 번이나 나눠 걸어야 했던 북한산 둘레길 21개 구간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항상 사전 답사까지 하며 우리의 불편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 애썼던 까메오님과 쓰시님 부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길을 같이 해준 용팔이님,

  뒤늦게 합류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자리를 지켜준 뚜껑이님,

  그리고 귀한 시간 쪼개어 틈나는 대로 자리를 빛내주신

  안산하림님, 송사리님, 오백원님, 미지수님, 관악산님, 빅토리아님, 하늘빛님,

  들국화님, 늘푸른 소나무님, 바람돌이님, 뿌잉뿌잉님, 또또또....

  만나서 즐겁고 귀한 추억의 시간들이었습니다.

  아차차, 또 빼먹을 뻔 했구나, 항상 내 손을 잡아주는 안나님, 사랑해요~~~~

 

  어, 근데 저 위에 뭐가 있지???>

 

 

<둘레길 완주 기념으로 오늘은 이곳에서 푸짐한 안주에

  소주, 맥주, 막걸리로 실컷 배를 채우고도 모자라~~>

 

 

종로 5가를 지나가다 광장시장 안 육회집에 들러 2차까지 마치고서야 집으로 향했습니다.

 

까메오님, 다음엔 어디로 갑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