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교장'을 나와 우린 같은 '경'자 돌림인 '경희궁'으로 향합니다.
흥화문(興化門)
"경희궁의 정문. 원래는 현재의 구세군회관 빌딩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제가 1932년 흥화문을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의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떼어갔던 것을
서울시에서 1988년 경희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현재의 위치에 이전하여 복원하였다."
<요 동네를 다니면 왜놈들 소리 안나오는 데가 없습니다.>
<흥화문을 지나 조금 올라가면 왼편에 '서울 시립미술관 경희궁 분관'이 있습니다.
공짜라서 들어가 봤는 데, 한가닥씩 하는 아마추어 서예가들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어디 토룡체 전시회같은 곳 없나? 나도 출품할 수 있는 데....ㅎㅎ>
- 개신교 성경, 마태복음 5장 9절~10절 말씀 -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 1995년판 공동번역 성서, 마태오 복음서 5장 9절~10절 말씀 -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2005년판 신약 성경, 마태오 복음서 5장 9절~10절 말씀 -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기가막힌 글씨체로 씌여 있습니다.
무슨 글자인가 집에 있는 성경을 찾아봤는 데 맞지 않아서, 인터넷에서 개신교 성경을 찾아봤습니다.
그래도 몇 자는 다릅니다. 뭔지 모르겠습니다.>
<여긴 그냥 멋있어서 한 컷!>
<이 처자는 너무 예뻐서 한 컷!>
경희궁(慶熙宮)
"경희궁은 조선후기의 이궁(離宮)이었다.
1617년(광해군 9)부터 짓기 시작하여 1623년(광해군 15)에 완성하였다.
~~ 경희궁은 도성의 서쪽에 있었다고 하여 서궐(西闕)이라고도 불렀는 데
이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하여 동궐(東闕)이라고 불렀던 것과 대비되는 별칭이다.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경희궁에 머물렀는데,
특히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다."
<임금은 저 위에 계시고,
정1품부터 종9품까지 문무백관들은 이곳에 나열했을 터이고...>
<내가 좋아하는 얼짝 각도 한 컷...>
숭정전(崇政展)
"경희궁의 정전(正展). 경희궁 창건공사 초기인 1618년(광해군 10)경에 건립되었다.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朝會)를 하거나 궁중 연회, 사신 접대 등 공식 행사가 진행되었던 곳이다.
특히 경종·정조·헌종 등 세 임금은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면서 1926년 숭정전 건물을 일본인 사찰인 조계사(曹谿寺)에 팔았는 데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正覺院)으로 남아있다.
현 위치의 숭정전은 복원된 것이다."
"경희궁에는 정전인 숭정전을 비롯하여 편전인 자정전, 침전인 융복전, 회상전 등 100여동의 크고 작은 건물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경희궁은 수난의 역사를 맞이하였다.
1910년 일본인 학교였던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대부분의 궁궐 건물이 헐려 나갔고,
그 면적도 절반 정도로 축소되어 궁궐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서울특별시에서는 경희궁지에 대한 발굴을 거쳐 숭정전 등 정전 지역을 복원하여 2002년부터 시민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왜놈들은 우리 궁궐을 아이들 장난감인 로고 조각쯤으로 취급했나 봅니다>
<나 어렸을 적, 광주공원에 전차가 한 대 왔습니다.
서울에서 전차가 철거되자 수완좋은 사람들이 그걸 챙겨 지방순회하면서 돈받고 태워주었습니다.
그것이 전차에 대한 기억 전부인 데, 서울 역사박물관 앞에 서있군요.>
망치질하는 사람(Hammering Man)
'미국의 설치미술 작가인 조너선 보로프스키(Jonathan Borofsky)의 설치 조형물
높이 22m, 무게 50t의 철제 조형물로, 오른손에 들린 망치가 1분17초 간격으로 서서히 내리친다.
1980년 파울라 쿠퍼 갤러리에서 처음 전시된 후, 독일, 스위스, 미국 등에 이어 세계 7번째의 도시로 서울에 설치되었다.
이 작품은 작가가 어릴 적 아버지에게 들은 친절한 거인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었다 하며,
단순하게 실루엣으로 표현된 이미지와 망치를 든 오른팔의 반복적인 움직임을 통해서
현대사회의 운명과 철을 이용해 노동하는 현대인의 고독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라 한다.'
<엄청 큽니다! 지나가는 사람과 비교해 보세요.
어? 근데 경찰들은 담배를 피우고 있네?
아니구나, 확대해서 보니 볼펜이구나! 신고했으면 무고죄로 걸릴뻔 했네, 휴우~~>
구세군 중앙회관(서울시 기념물 제20호, 구세군 역사박물관)
"감리교 목사였던 영국인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에 의해 창시된 구세군은 1908년 10월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
캐나다와 미국 등지에서 모은 헌금으로 1928년 지금의 정동 구세군중앙회관을 지어 '구세군 사관학교'로 사용하였다.
구세군사관학교는 1943년 3월 일제에 의해 폐교되었다가 1947년 다시 문을 열었다.
1959년 선교 50주년을 맞이해 증축공사를 벌였는 데, 이때 '구세군중앙회관'으로 불렀다.
구세군자선냄비가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28년 2월이다."
<지금은 없어져버린 회사 다닐 때, 이곳 리모델링 공사를 했었는 데...>
<위에는 '구세군사관학교 1928'
아래는 '구세군 중앙회관'이라 쓰여있네요.>
<내가 얼마나 무식하냐 하면,
구세군은 성공회 소속이고, 이들의 하는 일은 연말에 냄비들고 종치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으니...>
구세군(Salvation Army, 救世軍)
"군대식으로 조직·운영되는 국제적 규모의 그리스도교 교파 및 자선단체.
구세군은 1865년 런던 이스트 엔드에서 복음 선교를 시작한 감리교 목사 윌리엄 부스에 의해 창시되었다.
그는 가난한 자에게 식량과 주택을 공급하기 위해 선교국을 세우고, 1878년에는 그 이름을 구세군으로 바꾸었다.
그는 아들 윌리엄 브람웰 부스와 함께 구세군을 점차 군대 체제로 바꿔나가면서 자신은 종신대장(終身大將)이 되었다.
이것이 잉글랜드·스코틀랜드·웨일스 등에 급속히 퍼져나가 마침내는 국제적인 단체가 되었다."
<덕수궁 하면 돌담길이 떠오르고,
그 돌담길을 연인이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나 어쩐다나...
학교다닐 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난 지금까지 한 번도 안걸었습니다.
내겐 태어나서 지금까지 만나본 여자라고는 아내밖에 없습니다.>
<덕수궁은 다음에 따로 들어가 보기로 하고~~>
<쓰나미 시청을 흘낏 보고는~~>
<성공회 서울성당으로 향합니다.>
성공회 서울성당(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5호,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1922년 영국인 A. 딕슨의 설계에 따라 영국 성공회의 지원과 국내 신자의 헌금으로 착공되어 1926년에 완공되었다.
처음에는 '십자가'형태로 설계되었으나, 양쪽 날개와 아래쪽 일부를 떼어낸 채 '일자형' 건물로 지어졌다.
영국의 렉싱턴 지역의 한 박물관에서 설계도 원본이 발견되어 1996년 5월 축성식 이후 지금의 모습으로 완공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서양인에 의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설계된 본격적인 서양식 건물이란 점에서 의미가 있다."
<성당 내부.
성당은 역시 고풍스런 멋이 나야....>
경운궁 양이재(등록문화재 제267호)
"1904년 경운궁(덕수궁) 대화재 이후 중건 때 궁 안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원래는 경운궁 함희당(咸喜堂)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함희당은 1960년에 헐리고 양이재 뒤편에 복도만 일부 남아있다.
대한제국 시기인 1906년에는 황족과 귀족 자제를 교육하기 위해 설치한 근대식 교육기관인 '수학원(修學院)' 건물로 쓰였다.
고종황제 승하 후 경운궁이 분할되는 과정에서 성공회성당에 매각(1920)되어 1927년 지금의 자리에 옮겨졌다.
한때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사무실로 쓰였고, 지금은 주교 집무실로 사용되고 있다."
<성당 뒷편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곳은 사제관.
왼쪽 아래편에 기념비가 있어 뭔가 하고 봤더니~~>
유월 민주항쟁 진원지
"유월 민주항쟁이 이 자리에서 시작되어
마침내 민주화의 새 역사를 열다."
- 유월 민주항쟁 10년을 기념하여 세우다. 1997. 6. 10 -
여기까지 하여 정동길 산책을 끝냈습니다.
블로그에 올리려 정리하면서 이것 저것 찾아보니,
정동은 '근대유산의 1번지'라기보다는 '슬픈 역사 1번지'가 더 맞는 듯 싶습니다.
그럼 지금은?
남북이 서로 못잡아 먹어 안달이고,
4대 열강들은 주변에서 부추기고 즐기고 이간질하고 있고,
우매한 백성들은 마냥 허수아비 춤이나 추고 있으니....
그래도 찌그러지지 않고 이만큼 버티고 있는 것은,
우리가 지구상에서 최고로 우수한 민족이기에 가능한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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