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를 배울 때 많이 듣던 단어들!
아펜젤러, 아관파천, 을사늑약, 이화학당, 배재학당....
오늘은 그 단어들이 존재했었던 공간에 왔습니다.
근대유산 1번지 정동!
정동(貞洞), 시작과 현재
"정동은 1396년(태조 5년)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이 도성 안(지금의 정동)에 조성되면서 생겨났다.
그러나 정작 정릉은 태종 이방원에 의해 도성 밖(지금의 정릉동)으로 옮겨지고,
정동은 정릉의 기억을 새긴 이름만 간직하고 있다.
1883년 미국공사관이 처음 들어선 이후 영국(1884), 러시아(1885), 프랑스(1889), 독일(1891), 벨기에(1901) 등
각국의 공관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정동은 서양의 외교가로 변모해갔다.
서양식 교육기관과 종교, 의료 시설 등도 잇달아 들어서자
정동은 자연스럽게 근대 서양 문물이 유입되고 수용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아울러 정동은 근대 시기 제국주의의 세력 다툼 속에
자주 독립국의 위치를 지켜 나가기가 매우 어려웠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아관파천(1896)의 현장이자
조선왕조가 자주적 근대국가로 탈바꿈하고자 대한제국을 선포한 뜻깊은 역사의 공간이다.
지금도 근대 역사를 전하는 유산이 많이 남아 있는 정동은 서울 도심 속 '근대유산 1번지'로 불린다."
<시청역 10번 출구를 나와 조금 걷다가 파리바게뜨 건물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면
550년도 넘은 향나무와 함께 자리한 고풍스러운 건물이 보입니다.>
배재학당 동관(서울시기념물 제16호,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은 1885년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 목사에 의해 세워졌다.
당시 정동의 한옥 한 채를 사서 학교를 개설하였다가 1887년에 최초의 서양식 벽돌양옥으로 배재학당 본관을 준공하였다.
현재 남아있는 배재학당 동관은 1916년에 건립되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소설가 나도향, 시인 김소월, 한글학자 주시경, 독립운동가 지청천 등이 이 학교에서 배출되었다.
1984년 배재중고등학교가 서울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전하면서 배재학당 동관만 남았고
지금은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새롭게 단장되었다."
<별 것도 없는 데 사진찍으면 안된다기에, 내부를 둘러보다가 삐쳐서 그냥 나왔습니다.>
정동교회(사적 제 256호, 정동제일교회)
"1885년 4월 아펜젤러 목사가 선교사로 와서 한옥 한 채를 구입해 예배를 봄으로서 정동교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897년 12월 현재의 자리에 최초의 서양식 개신교회로 건립되었으며, 건축가 심의석이 시공을 맡았다.
정동교회는 일제강점기 항일 활동의 거점으로서, 이곳에서 독립선언문이 비밀리에 등사되었다.
이 때문에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된 이필주 담임목사와 박동완 전도사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 큰 피해를 입었으나 1953년 복구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아펜젤러 목사(Rev. Henry Gerhard Appenzeller)
"아펜젤러 목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최초의 미국인 감리교 한국 선교사로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내한하여 1902년 6월 11일 순교하기까지 정동제일교회의 초대 목사로 시무하였다."
<지금은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사용중인 구 대법원청사의 입구에는
최정화님의 작품 장미 빛 인생(La vie en rose)이 있고~~>
<이 작품의 제목은?
'딴청 피우는 아이들' ㅎㅎㅎ
미술관 관람은 다음에 하기로 하고 발걸음을 옮깁니다.>
장독대 - 이 환 권 -
"한국에서는 장독(sauce jar)에 갖가지 발효된 장(sauce)을 담는다.
장은 한국 전통음식 맛을 내는데 쓰이며, 이것은 한국 여성들에 의해 관리되고 전수되어 왔다.
장독들을 모아두는 장소를 '장독대'라고 하는 데, 장독대는 한국이으로 하여금 가정적인 향수를 불러 일으키게 한다.
특히 눈 덮인 장독대에서 나는 크고 작은 독들의 모습을 보며 겨울나기 하는 가족을 떠올린다.
작품에 반영된 가족들은 조부모, 부부, 아이들 3대로 구성하였으며, 내 친구의 가족을 모델로 하였다."
<장독대와 찌그러진 군상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지, 내 상상력으로는 이어지지가 않습니다.>
<정동극장, 어디서 이름은 많이 들었는 데 여기 있었군요!>
<안에 들어가니 벽화도 예쁘지만~~>
<아내는 더 예쁩니다.... ㅎㅎ>
중명전(사적 제124호, 중명전 전시관, 문화유산국민신탁)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 경운궁(덕수궁)의 황실 도서관으로 사용된 서양식 건물로, 본래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다.
1904년 경운궁 대화재로 고종이 머물렀고, 1906년 '중명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05년 을사늑약, 1907년 헤이그특사 파견의 현장으로 대한제국의 좌절과 국권수호 의지가 담긴 곳이다.
1963년 영구 귀국한 영친왕과 아방자 여사에게 기증되어 생활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문화재청이 2006년 매입해 '중명전 전시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근대사를 배울 때면 항상 속 뒤집어지는 이야기들이 나오는 데~~>
<1905년 11월 18일 새벽, 이곳에서 을사늑약이 강제되었습니다.
학교다닐 때는 을사보호조약이라 배웠었는 데, 용어가 바뀌어 그나마라도 다행입니다.
* 늑약 : 억지로 맺은 조약
* 조약 : 국가 간의 권리와 의무를 국가 간의 합의에 따라 법적 구속을 받도록 규정하는 행위. 또는 그런 조문 >
<1907년 4월 고종은 을사늑약이 자신이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이준, 이상설, 이위종)를 파견하였는 데,
특사들은 회의장에도 들어갈 수 없었답니다.>
<1915년부터는 이곳 중명전이 외국인들의 사교 클럽으로 쓰였답니다.>
<나같은 사람이나 속 뒤집어지지, 지금도 활개치고 있는 친일파들이야 이곳이 기분좋은 장소이겠지요.>
정동 이화여고 심슨기념관(등록문화재 제3호, 이화박물관)
"이화학당은 1886년 메리 스크랜튼 부인(Mrs. Mary F. Scranton)에 의해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신식 여성교육기관이다.
이화학당에 속한 심슨기념관은 미국 컬럼비아 리버 지회의 홀부룩(Holbrook)이 희사한 기금으로 1915년 3월 준공되었다.
당시 세상을 떠난 홀부룩의 동생 사라 심슨을 기리는 뜻에서 건물 명칭을 '심슨기념관(Simpson Momorial Hall)'이라 불렀다.
1922년과 1961년에 걸쳐 증축되었고, 한때 이화여중 교사로 쓰이다가 현재는 이화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안쪽의 현대식 건물은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인데,
입구의 옛스런 대문이 참 멋집니다.>
<100주년 기념관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경사로의 조합이 너무 멋져서 한 컷!>
<어린 왕자가 사는 별도 아닌 콘크리트 덩어리 서울 도심 한복판에,
사람 그림자 하나 볼 수 없는 공원이 있습니다. 바로 정동공원!>
<그 가운데에는 팔각정이 있는 데, 완전히 나무로만 만들어졌습니다.
거기다가 꽤나 벗어진 흰색 페인트는 이곳이 오래되었다고 자랑하고 있는 듯 합니다.>
구 러시아공사관(사적 제253호)
"을미사변(1895)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고종이 세자(순종)과 1년간 피신해 머물렀던 '아관파천'의 현장이다.
건물은 르네상스식으로 3층의 벽돌 구조이다.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A. I. Scredin Sabatine)이 설계하여 1885년 착공하고 1890년 완공하였다.
러일전쟁(1904)와 을사늑약(1905)를 거치면서 공사관으로서 기능이 크게 축소되었으나, 1949년까지 공사관으로 쓰였다.
한국전쟁 중 건물이 크게 파손되었으며, 이후 몇 차레 보수공사를 거쳐 현재는 망루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1층에는 아치형 출입구가 있다."
<한 나라의 왕이 왜놈들이 무서워 도망을 갑니다.
선조는 명나라로 도망가다가 돌아오고,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도망가서 1년이나 살다 오고...
그로부터 100여년 후 겨우 챙겨 놓았더니,
가져가라고 가져가라고 해도, 안가져 간다고 안가져 간다고 박박 우기며,
가스통 들고, 띠두르고 전 세계에 하소연이나 하는,
전시작전 통제권 못받겠다고 하는 족속들은 뭥미???>
<정동공원과 구 러시아 공사관을 한데 묶었더니, 그림은 보기 좋습니다. 으휴우~~~>
<캐나다 대사관 앞, 560여년 된 회화나무>
<강북 삼성병원에는 많이 갔었는 데 왜 갔더라? 치과에 한 번 가고, 나머지는 모두 장례식장...
무심결에 다녔는 지, 이곳에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서울 경교장(京橋莊, 사적 제465호)
"이곳은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인 1938년에 금광업을 하던 최창학의 양옥 주택이다. 이곳의 설계와 시공은 김세연이 담당하였다.
경교장이라는 이름은 이곳이 광복 후 백범 김구 선생의 거처로 쓰이면서 근처 개울에 있는 경교라는 다리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 백범은 광복 후 3년 7개월간 이곳에 머물면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하다가 1949년 6월 26일 이곳에서 저격을 받아 서거했다.
백범 서거 후 이곳은 자유중국 대사관저로 쓰였고, 6·25 동안에는 미 특수부대 시설로,
휴전 후에는 월남 대사관저로 사용되다가, 1967년 고려병원(현 강북 삼성병원)에서 인수하였다.
그 후 대대적으로 수리를 하였으나 외관과 지붕은 지금도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백범이 사용하던 2층의 침실 부분을 복원하여 백범 기념실로 사용하고 있다.
백범을 항했던 총탄의 자국은 그날의 모습 그대로 침실 창의 유리에 남아있다."
1층 응접실
"국무위원회 등 임시정부의 대표적인 회의들이 개최되고, 김구가 국내외 주요 인사들을 접견했던 곳이다"
귀빈식당
"1945년 12월 2일 임시정부의 공식 만찬이 개최되고,
김구가 서거했을 때 빈소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거실(집무실)
"김구 주석이 평상시 공무를 보거나 접견 장소로 사용하였던 곳이다.
또한 1949년 6월 26일 대한민국 육군 소위이며 주한미군 방첩대(CIC) 요원인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한 곳이다."
<아내가 서있는 바로 저 자리에서 안두희는 백범을 향해 총탄을 발사했다고 합니다.
그는 종신형→15년 형→1950년 잔형 집행정지→육군 소위로 복귀→중위/대위/소령 예편→1953년 완전 복권.
천수를 누릴 줄 알았으나 80세이던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경 인천 중구 신흥동에 있는 그의 집에서
경기도 부천 소신여객 소속 버스 운전 기사였던 당시 46세의 박기서(朴琦緖)님이 휘두른 몽둥이에 여러 차례 맞아 뒈져버렸습니다.>
김구 혈의(金九 血衣)
<왼쪽 팔까지 찢은 자국이 선명합니다.
돌아가시고 나서 옷을 벗기려 그랬던게지요.>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 [나의 소원],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중에서 -
오늘은 이 글을 올리다 말고,
소주 한 병 벌컥벌컥 들이키고,
다시 계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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