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 기웃기웃

추사 김정희 고택

상원통사 2014. 1. 5. 21:38

종이지도를 펼치고 신리성지 근처에 어디 들를만한 곳이 없나 찾아보니 '추사 고택'이 눈에 띕니다.

초가집 한 채 달랑있을 것이고, 안내판은 조그마할 것이고, 주차장은 글쎄?

그런데 막상 도착해 보니 그게 아닙니다.

찌그러진 양반가문이 아니라, 명문 사대부 집안이었습니다.

추측컨데 세한도에 나오는 집도 초가집이 아니라 기와집임에 틀림없습니다.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는 추사 고택을 찾았습니다.

<눈이 쌓여 기왓골이 반듯하게 드러난 고택이 뒷산과 하나되어 눈앞에 펼쳐집니다.>

"추사고택은 추사의 증조부이며 영조대왕의 부마이신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께서

 1700년대 중반에 건립한 53칸 규모의 양반 대갓집으로,

 추사선생께서 태어나서 성장한 곳이며,

 주변에는 추사선생 묘, 월성위·화순옹주 묘와 정려문, 백송,

 추사선생이 수도하던 화암사 등 추사선생과 관련된 문화유적이 있다."

"사랑채는 바깥 솟을대문을 들어선 마당에 자리잡은 'ㄱ'자형 집이다.

 원래 사랑채와 안채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 조선시대의 가택 관념이었는 데,

 이는 유교적 윤리관념에 근거한 것이다.

 이 사랑채는 남쪽에 한 칸, 동쪽에 두칸의 온돌방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대청과 마루로 되어있다.

 이와같이 마루공간이 큰 것은 주인공의 사회적 활동이나 예술적 활동을 하는 데 요긴하게 쓰였을 것이다."

<우린 솟을대문을 지나 사랑채에 들어섭니다.>

<사랑채 전경>

<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이런 글씨를 주련(柱聯)이라고 하네요. 

 世間兩件事耕讀('세간양건사경독'이라. 세상에서 두 가지 큰 일은 밭갈고 독서하는 일이다.)

 그 뜻이 제일 멋져보여 하나 올립니다.>

해시계

"김정희가 직접 제작했다고 하는 이 네모난 돌기둥은 해시계로 쓰였다.

 건물 전체가 동서 방향으로 자리잡은 데 비해 돌기둥은 남북방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앞면에 새겨진 석년(石年)이라는 글씨는 김정희의 아들 김상우가 추사체로 써서 새긴 것이라고 한다."

<이 해시계는 사랑채 앞마당에 있습니다.>

<주춧돌들이 예뻐서 한 컷 담아보았습니다.>

"추사고택은 304.47㎡(92평)으로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문간채, 사당채가 있다.

 안채는 6칸의 대청과 2칸의 안방과 건넌방이 있고,

 안방 및 건넌방의 부엌과 안대문, 협문, 광 등을 갖춘 'ㅁ'자형의 집이다.

 안방과 건넌방 밖에는 각각 툇마루가 있고, 부엌 천정은 다락으로 되어 있으며,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있는 대청은 6칸으로 그리 흔치 않은 규모이다.

 이러한 'ㅁ'자형 가옥은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이른바 '대갓집'형이다."

<오른편 건물이 사랑채, 왼편 두 채로 보이는 곳이 안채입니다.>

"여성들의 생활공간인 안채는 밖에서 바로 들여다보이지 않는 구조로 되어있다.

 특이한 것은 안채 내의 부엌은 난방용으로만 쓰이고 요리를 위한 부엌은 따로 두었다는 점이다.

 이는 왕실 주택 구조로서, 왕실 사람인 화순옹주가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안채로 들어가는 출입문인 안대문>

<흔치않은 규모의 6칸 대청 마루.

  대청 대들보에는 김정희가 쓴 것으로 보이는 글씨가 붙어 있었다 합니다.>

<왼편이 안방, 오른편이 부엌, 부엌 윗쪽은 다락입니다.

  이 부엌이 순수 난방용이랍니다.>

<협문 뒷쪽에 우물로 나가는 출입문이 보입니다.>

<마당에서 본 안채>

영당(影堂)

"김정희가 세상을 떠난 뒤 아들 김상무가 세운 영당이다.

 김정희의 평생의 벗 권돈인은 영당 세우는 일을 돕고 추사체로 추사영실(秋史影室)이라는 현판을 직접 썼다.

 또한 김정희의 제자였던 이한철에게 대례복을 입은 김정희의 초상을 그리게 했다.

 권돈인은 이 초상화에 찬문을 쓰고, 김정희를 추모하는 여덟 수의 시를 지어 김상무에게 주었다.

 현재 초상화의 원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현판의 원본은 간송미술관에 있다."

<안채 뒷편에 영당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영당 옆, 눈밭의 대잎이 예뻐서....>

<영당 전체 모습은 담장 밖에서 이렇게 밖에 찍을 수 없군요.

  어안렌즈가 있다면 다르겠지만...>

<영당에서 내려다본 사랑채(좌)와 안채(우)의 뒷뜰>

<반대로 영당을 올려다 보았는 데, 이 그림이 훨씬 예쁘군요>

우물

"가문 대대로 이용해 온 우물이다.

 우물에는 김정희의 출생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민규호가 쓴 '완당김공소전'에 따르면 어머니 유씨가 임신한 지 24개월만에 김정희를 낳았다고 한다.

 그 무렵 우물물이 갑자기 마르고 뒷산인 팔봉산의 나무들이 시들었다가

 김정희가 태어나자 우물물이 다시 샘솟고 나무들이 생기를 되찾았다는 것이다."

<옛사람들 뻥도 보통이 아닙니다.

  근데 그 옛날에도 로마문자가 전파되었나?  오메가(Ω)가 선명히 보입니다.>

<솟을대문으로 돌아다니지, 저 문을 통해 물을 길으러 다녔겠지요.>

<추사 김정희 선생 묘

 또다른 세한도라 칭해도 될까요?

 소나무 가지 아래 흙으로 지붕을 이은 집이 있고, 그 안에 추사께서 잠들어 계시고...>

<소나무는 항상 봐도 멋집니다.>

<이곳이 눈썰매장이 되었습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 연보

1786.6.3 충청도 예산 향저(신암면 용궁리)에서 출생

24세에 생원시에 일등으로 급제함

31세에 북한산 순수비를 확인함

34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승승장구하여 54세에 형조참판이 됨

55세에 윤상도 옥사사건으로 당쟁에 몰려 제주도에 유배됨(63세까지 8년간)

59세에 세한도 제작

66세에 진종조례론의 배후 발설자로 지목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됨(1년간)

71세에 경기도 과천에서 별세

선생은 북학파의 거벽으로서, 청조의 고증학풍을 도입하여

학문으로는 경학, 금석학, 문자학, 사학, 지리학, 천문학에 이르기까지 박통(博通)하였고,

북한산 기슭의 비석이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巡狩碑)임을 고증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완당집, 예당금석과안록, 실사구시설, 완당척독, 담연재시고 등이 있다.

이와 같이 넓고 깊은 학문과 천부의 재질을 바탕으로 한 추사의 예술은

시(詩), 서(書), 화(畵), 전각(篆刻) 등에도 뛰어났으며,

서도는 추사체(秋史體)라는 독자일문(獨自一門)을 열어 서예사상 지고의 경지를 이룩하였다.

작품으로는 '묵란도', '묵죽도'와 국보로 지정된 '세한도' 등이 있다.

<추사기념관.

  1층에 전시장, 영상실등이 있는 데 촬영 절대금지라 눈으로만 대충 보았고~~>

<2층에서 사진전시회를 하는 데, 부끄러워 카메라는 슬쩍 숨기고 올라갔다가~~>

<아무도 없기에 얼른 몇 컷 찍었습니다.

  난 언제나 이렇게 찍어서 전시해보나???>

<아니다, 솜씨는 되는 데 카메라가 안좋아서 그렇다. ㅎㅎ

  이러면 조금 위안이 되나? 에이, 말도 안된다.>

배가 고픈데, 근처에 먹을 것 파는 곳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할 수 없이 여사울 성지까지 가야할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