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 기웃기웃

옛날식 데이트 : 인사동-삼청공원-길상사

상원통사 2013. 12. 30. 00:06

나    : 금년이 가기 전에 부부이 얼굴 한 번 보고 저녁 먹었으면 하는 데, 가능한 지 연락 주세요.

별빛 : 그이와 상의해서 연락드릴께요. (한참 후) 옆지기도 좋다고 합니다.

나    : 어디로 갈까? 우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소래포구에 가서 회 한 접시, 또는 노량진 수산시장에 가서 회 한 접시,

         영등포역 앞 타임스퀘어에 가서 아이쇼핑 등등이 생각나는 데,

         이런 것은 어떨까요?  학창 시절로 돌아간 상상을 하며,

         종로에서 만나서, 인사동길 구경하고, 풍문여고를 지나 삼청동 카페 골목을 구경하고,

         삼청공원을 한 바퀴 돌고나서, 감사원 앞길을 따라 걷다가 성균관대 쪽으로 빠져 나오는 코스...

         조금 두툼히 입고 나와, 팔짱 끼고 쌍쌍 데이트하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시간은 온종일도 좋고, 반나절도 좋고,

         회비는 학생이니 조금씩만 갖고 나오고,

         추위는 사랑으로 녹이고.....

 

그렇게 우린 11시에 종로2가 YMCA 앞에서 만났습니다.

데이트에 방해될까봐 카메라는 아예 가져가지 않으려 했는 데,

가방에 담아왔으니 어쩔 수 없이 꺼내지더군요. 단 최소한의 셔터만 눌렀습니다.

 

<아침이라 그런지 가게들도 많이 열지는 않았고, 사람들도 조금 뜸한 인사동길.>

 

 

<건물 전체가 나선형 램프로 이루어져있어

  1층에서 옥상까지 계단없이 올라갈 수 있는 '쌈지길'에 들렀습니다.>

 

 

<우리도 데이트 나와서 그런가?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사랑의 표징들이 눈에 띕니다.>

 

 

<사랑에 둘러싸여 한 컷!>

 

 

<우리도 한 컷 추가!

  자세히 보니 우린 외투도 닮고, 바지도 닮고, 신발도 닮았네요!>

 

 

<기린도 데이트 중!>

 

 

<버섯은 벌써 사랑의 씨앗이 나와 부렀네! 어짜끄나... ㅋㅋㅋ>

 

 

<낙서투성이인 이곳에서 굳이 한 컷 찍어 달라고 해서...>

 

 

<이렇게 인사동길 구경을 마치고~~>

 

 

<풍문여고 옆길을 따라 올라갑니다.>

 

 

<삼청동 카페 골목은 전에 소개했으므로 사진 소개는 생략.

  근데 이것 사람크기의 인형같은 데....>

 

 

<'서울서 둘째로 잘하는 집'

  1976.4.19에 문을 연 한방차와 단팥죽 파는 집.

  간판글씨도 작아 잘 보이지도 않는 데, 어떻게 알았는 지 아침부터 나라비를 섰습니다.

  난 줄서는 곳과는 영 체질에 안맞아서...>

 

 

<우린 '보리밥이 맛있는 집'에서 막걸리와 빈대떡과 보리밥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삼청공원에 들어섭니다.>

 

 

<술에 취해 걸음걸이가 비뚤고 바르지 않다고 친구들이 붙여준 호가 횡보(橫步)인 염상섭(廉想涉)

  그의 옆에 기대고 앉아 슬며시 눈을 감아보는 별빛님,

  저 자리는 내가 앉아야 하는 데....

  아니구나, 그 옆지기도 보통 술꾼이 아니지.  ㅋㅋㅋ>

 

 

<삼청공원을 나와 성균관대 쪽으로 걸었는 데,

  예상보다 너무 빨리 도착하여 조금 더 걷기로 했습니다.

  와룡공원에서 먹거리 파는 아주머니께 길상사를 물어보니 20분이면 간다고 합니다.

  예정엔 없었지만 우린 길상사까지 가기로 일정을 변경했지요.

  성벽따라 쭉 가면 나온다고 했는 데, 가는 도중 길을 잘못들어 조금 헤맸습니다.> 

 

 

<길상사 올라가는 길에 성북동 성당이 있는 데, 참 예쁩니다.

  전깃줄에 가로막힌 이 사진과는 전혀 다릅니다. 한 번 찾아가 직접 보시라고 일부러 올립니다.>

 

 

<"아기예수 탄생을 축하합니다.  길상사"

  예수님이 마굿간에서 나셨나, 절간에서 나셨나???

  사흘 후면 크리스마스입니다.>

 

 

<옛 요정이 절이 되고, 법정스님이 어쩌고 저쩌고...

  어렴풋이만 알고 있었던 '길상사'에 도착했습니다.>

 

 

 

"여기 침묵의 그늘에서 그대를 맑히라

 이 부드러운 바람결에 그대 향기를 실으라

 그대 아름다운 강물로 흐르라

 오 그대 안 저 불멸의 달을 보라"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좋은 글귀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길상7층 보탑

"이 석탑은 길상사를 무주상보시한 길상화 보살님과 법정 스님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길상사와 성북성당, 덕수교회가 함께 한 종교간 교류의 의미를 전하기 위해

 영안모자 회장 백성학이 2012년 11월 11일 무상으로 기증하여 복장봉안품을 봉안하여 세워진 탑이다.

 (조선 중기(1600~1650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

 

 

"관세음보살상이 머리에 쓴 관이 무엇입니까.” 

   “화관(花冠)입니다.”
“손에 들고 있는 병은 무엇입니까.”

   “정병(淨甁).”
“손바닥이 이쪽에서 보이도록 만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구고(救苦).”


1999년 여름, 원로 조각가인 최종태 서울대 명예교수의 작업실에 길상사 회주였던 법정 스님이 찾아왔다.

한국가톨릭미술가협회장으로 전국의 성당에 성모상을 세워온 최 교수에게 관음상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러 온 것이다.

최 교수는 “나도 짧게 (세 가지를) 물었지만 스님은 토씨 하나 안 붙이고 외마디 답으로 알려 주었다”며

“꽃관에다, 정화수에다, 세상 고통 구한다는 세 마디 말씀을 듣는 순간 작품은 다 잡혔다”고 회고했다.

최 교수는 1958년 가톨릭에 입교했지만 서울대 미대 졸업 후 3개월간 불교 교리를 배웠다.

“내 신앙적 본향은 가톨릭이지만 원천은 불교였다” 
“성모상과 관음상은 영원한 어머니로서 대자대비이고 큰 사랑이며, 맑음과 깨끗함, 고귀함과 온화함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여성상이다”

김수환 추기경에게 “성모상을 만들던 내가 관음상을 만들면 천주교에서 나를 파문하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김 추기경은 “일본에서도 천주교가 전파된 초기에 관음상 한 귀퉁이에 작은 십자가를 표시해 기도를 드리며 박해를 피했던 일도 있다”며 격려했다.
                                                                                                      - 동아일보 기사에서 퍼옴. 조중동도 문화/예술/과학기사는 괜찮음 -

 

<여기고 저기고 간에,

  하도 큰 것을 좋아하는 세상이라,

  엄청나게 큰 줄 알았더니,

  우리 키보다 작은,

  안아보고 싶은 관세음보살님입니다.>

 

 

범종각(梵鐘閣)

"범종(梵鐘)은 법고(法鼓), 목어(木魚), 운판(雲板)과 더불어 사물(四物) 가운데 하나이다.

 범종은 땅위와 하늘세계를 울려 인간과 천신을 제도하며,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법고는 땅위의 축생을 제도하며,

 물고기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목어는 수중의 중생을 제도하며,

 구름문양이 새겨진 운판은 허공을 나는 새 등의 축생을 제도한다는 뜻을 각각 담고 있다."

 

 

극락전(極樂殿)

"아미타부처님을 봉안한 길상사의 본법당.

 ~~ 1997년 길상사 개산 당시, 아미타불을 주존(主尊)으로 모신 것은

 도심 가운데 생긴 이 도량이

 보다 많은 불자들을 이고득락(離苦得樂)의 길로 이끄는 터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적묵당(寂默堂)

"산행단체 법회장소 및 초파일 연등작업과 소식지 발송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침묵의 집

"누구나에게 열려있는 홀로 명상하는 공간.

  침묵의 집에서는 침묵을!

  침묵 속에서 고요함을!

  고요함 속에서 평화를!"

 

 

<여기는 그냥 고드름이 예뻐서... ㅎㅎ>

 

 

<이거, 연출한 것 아닙니다.>

 

 

<지금은 스님들의 처소이지만.

  친구는 80년대 중반에 이곳에 와서 식사를 했던 기억이 난답니다.>

 

 

<계곡 즈음에 앉아 계신 부처님>

 

 

 

아아, 어느 소설이 이보다 더 힘들 수가 있으랴!

읽는 동안 가슴이 먹먹하여 몇 번을 쉬었습니다.

소개된 그대로 여기 옮겨 봅니다.

 

공덕주 길상화

길상화(吉祥華) 김영한님(1916~1999)은 일제치하, 민족사의 암흑기에 태어나 성장하다,

사라져가는 한국 전통음악과 가무의 전습을 위하여 조선권번을 세워

불우한 인재들에게 고전 궁중 아악과 가무 일체를 가르친 금하(琴下) 하규일의 문하에서,

16살의 나이에 진향(眞香)이라는 이름을 받아 기생으로 입문하였다.

한때 시인 백석으로부터 자야(子夜)라는 아명(雅名)으로 불리었던 그녀는,

분단조국의 남한에서 1953년 중앙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뒤에 몇 편의 수필과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하규일 선생 약전], [내 사랑 백석] 등의 저술을 내기도 했다.

1955년 바위 사이 골짜기에 맑은 물이 흐르는 성북동 배밭골을 사들여

잠깐 청암장(靑岩莊)이라는 한식당을 운영하기도 했는 데,

이곳은 뒤에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제3공화국 시절 국내 3대 요정의 하나였던 대원각이 되기도 했다.

길상화님은 노년에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받아 스님을 친견한 뒤

생애의 가장 높고 아름다운 회향을 생각하고,

당시 시가 1,000억원이 넘은 7천여 평의 대원각 터와 40여 동의 건물을 시주하겠으니 절로 만들어주시기를 청하였다.

그 후 10년에 걸쳐 사양하시는 스님께 받아주시기를 거듭 청하여 결국, 1995년 그 뜻을 이루게 된다.

 

<다리 건너에 '시주 길상화 공덕비'가 있습니다.>

 

 

 

1997년 12월 14일 대원각이 길상사가 되던 날,

그 아름다운 법석에서 그녀는 법정스님으로부터 그저 염주 한 벌과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만을 받았고,

7천여 평 절터와 전가 모두를 보시하는 그녀의 바람은 단 하나,

이곳이 시민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 되어 그들 모두가 고뇌의 마음을 쉴 수 있는 곳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날 그녀는 수천의 대중 앞에서 단 두어 마디 말을 했다고 한다.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간절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실하게 울려 나오는 그녀의 음성에는

곡절 많은 그녀 인생의 슬픔을 넘어선 위대한 비원이 담겨있었다.

 

 

 

길상화 보살이 된 그녀는

"나 죽으면 화장해서 눈이 많이 내리는 날, 길상헌 뒤뜰에 뿌려주시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1999년 11월 14일 육신의 옷을 벗었다.

하루 전날 그녀는 목욕제계하고 절에 와서 참배하고 길상헌에서 생애 마지막 밤을 묵었으며,

다비 후 그녀의 유골은

49재 후, 유언대로 첫눈이 도량을 순백으로 장엄하던 날

길상헌 뒤쪽 언덕바지에 뿌려졌다.

 

<이곳이 길상헌입니다.>

 

 

길상사에서는 그 자리에 조그마한 돌로 소박한 공덕비를 만들어 세워 그녀의 뜻을 기리고,

매년 음력 10월 7일에는 기재를 모셔 그녀를 추모한다.

또한 길상사를 근본도량으로 하는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는

'맑고 향기롭게 길상화 장학금'을 만들어 해마다 30명 안팎의 고교생을 선발, 학비를 지원하며 그녀의 뜻을 잇고 있다.

 

<우리 키 반도 안되는

  '시주 길상화 공덕비'>

 

 

<부처님이 살아계실 때 이야기입니다.

  기구한 운명을 살아왔던 연화색녀가 집을 뛰쳐나와 기생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유곽사업은 날로 번창해서 유녀(기생)가 500명이나 되는 큰 유곽의 주인이 됩니다.

  부처님이 그 도시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교도들이 연화색녀에게 10만 금을 주고 부처님을 유혹해 타락시키도록 합니다.

  연화색녀는 부처님을 유혹하려고 유녀 500명을 모두 거느리고 부처님이 지나는 길목으로 나갔습니다.

  부처님은 다 헤진 옷을 입고 걷고 있고, 뒤에는 수많은 비구들이 거지 꼴을 한 채로 뒤따르고 있었지요.

  이 두 행렬이 길에서 마주칩니다.

  ~~

  연화색녀는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여쭌 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출가하기를 청했어요.

  부처님께서 출가를 허락하시자 연화색녀를 따르던 500여인도 모두 출가를 결심합니다.

 

  2,500여년 후,

  이 문으로는 얼마나 많은 유녀들이 드나들었을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한 순간 정신이 번쩍 듭니다.

  "정랑(淨廊) : 화장실을 불가(佛家)에서 부르는 이름."

  때 묻은 사람들아, 당신들보다는 훨씬 더 깨끗한 이곳에 오려면, 신발이라도 바꿔 신어라! 

  내 해석이 너무 무리한가???>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인증샷!>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 상(相)에 머무르지 않고(無住) 집착 없이 베푸는 보시.

                                      '내가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베풀었다.'라는 자만심 없이 자비스러운 마음으로 온전하게 베푸는 것.

                                       내가 도와준다고 생색을 내지도 않고, 많이 도와준다고 자랑하지도 않고, 너에게 도와주니 나중에 은혜를 갚으라는 생각도 전혀 없이

                                       도와주었다는 사실도 금방 잊어버리는 그러한 행동.   

마태오 복음 6장 3절     :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부처님, 예수님, 무주상보시, 마태오 복음...

  '무주상보시'라는 단어를 뒤로 하고 우린 길은 나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