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글자가 흐리게 보이고 눈 앞에 뭔가 낀 것 같이 침침하더니 눈을 깜박이면 뻑뻑한 느낌마저 들었다.
이거 틀림없이 눈병이구나, 나도 선글라스 끼고 다녀야 하는 불상사가 벌어지겠네, 걱정하며 생전 처음으로 안과를 찾았다.
이것저것 검사하고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의사 선생님 하는 말, "노안이 왔습니다!"
40대 중반의 일이다.
자랑할 것은 아니지만 난 좀 빨리 읽는 편이다.
외화를 볼 때도 자막을 다 읽고 한참 지나야 화면이 바뀌니 감상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
그런 내가 어느 날 TV를 보는데 다 읽지도 않은 자막이 올라가버리는 황당한 일이 발생했다.
이런 짜샤들, 제대로 좀 만들지, 내가 못 읽을 정도로 빨리 올라가면 남들은 어떻게 읽냐?
한 번 그러고 말았으면 좋으련만 그 날 이후론 뭔가 이상하다,
올라가는 자막만 문제가 아니라 화면 아래에 적힌 자막도 너무 빨리 바뀌고,
영화를 볼 때도 글자 읽느라 화면에 뭔 그림이 지나가는 지 놓치기가 일쑤다.
이상하다, 아무리 스피드 시대라고는 하지만 세상이 왜 이렇게 빨라졌나,
그 뿐 아니라 개그맨들도 말을 너무 빨리해 뭔 소리인지 이해 못 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뭔가 문제가 있구나, 세상이 문제인가 내가 문제인가?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 아하 그렇구나, 내 이해력에 문제가 생겼구나,
어렸을 적 보았던 할아버지들이 왜 한 글자씩 또박또박 신문을 읽었는 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40대 후반의 일이다.
베란다에 화분이 몇 개 있다.
봄이 되면 싹이 나고 여름이 되면 꽃이 피고 가을이 되면 잎이 떨어져 겨울나기 준비를 한다.
내가 하는 것이라곤 일 주일에 한 번씩 물주는 것 뿐인데 즈그들이 알아서 참 잘도 한다.
꽃나무만이 아니다. 어디서 씨가 날아왔는 지 뿌리지도 않은 싹도 틈새를 비집고 올라온다.
잡초라 무시하든 말든 영양분만 빨아먹는다고 뽑아버리든 말든 눈치 안 보고 제 할 일을 다한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묘하다. 생명이 그저 신비로울 뿐이다,
친구에게 그런 얘기를 했더니 하는 말, "나이 먹어서 그래!"
50대 초반의 일이다.
나이를 먹으면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하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지금껏 앞만 보고 사느라 고생했다고, 이젠 그 그늘에서 벗어나라고 하늘이 내려준 축복이다.
보기 싫은 것들은 잘 안보인다고 말해도 고개를 끄덕여주고, 듣기 싫은 것들은 잘 안들린다고 말해도 이해해준다.
지금껏 일하느라 수고 많았다고, 이젠 좀 갑질하며 살아도 괜찮다고 남들이 인정해주는 특권이다.
이만큼만 해도 충분한데 가끔씩 욕심을 버리지 못할 때가 있다.
머리숫이 별로 없는 친구에게 가발을 권했더니 하는 말, "이대로 살지 뭐~~"
그래, 나도 더 욕심내지 말고 이만큼 누리는 것만도 큰 행복인 줄 알고 하루하루 감사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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