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강에서 계속)
마하에는 초월한다는 개념이 있다.
‘마하’에는 초월한다, 모든 걸 이긴다(勝), 모든 것보다 뛰어나다는 개념이 있습니다.
‘모든 것보다 뛰어나다’는 개념으로는 ‘금강’을 비유로 드는데,
금강은 세상에서 제일 단단하므로 모든 것을 다 부술 수가 있어 그런 비유를 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금강반야나 마하반야는 사실은 같은 말입니다.
또 보살 앞에 마하를 붙여 마하 살(摩訶 薩, Mahā Sattva, 마하 사트바)이라고 하면,
큰 중생, 마음이 우주만큼 넓은 중생을 말합니다.
반야(般若) : 지혜, 깨달음
반야는 산스크리트어의 프라즈냐(prajnā), 팔리어의 판냐(paññā)의 음사어로, 지혜, 깨달음이란 뜻입니다.
지혜에도 여러 가지 수준이 있고, 깨달음에도 조그만 깨달음 큰 깨달음이 있는데,
부처님 수준의 깨달음은 번역하면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므로 원어 그대로 ‘반야’라고 씁니다.
‘반야’란 그냥 우리가 쓰는 지혜가 아니라 한량없는 지혜, 무한한 지혜, 완전한 지혜를 뜻합니다.
‘반야’라고만 해도 완전한 깨달음, 완전한 지혜니까 앞에 ‘마하’라는 수식어를 붙일 필요가 없지만,
붓다의 깨달음은 정말 완전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앞에다 ‘마하’라 붙인 것입니다.
반야가 일체의 번뇌를 깨트려버린다는 의미를 강조하려고 할 때는 ‘금강 반야’로 쓰고,
무한한 우주로부터 저 티끌까지 일체의 법의 실상을 다 안다는 의미로 쓸 때는 ‘마하 반야’로 씁니다.
관조반야 : 사물을 정확히 관찰하고 판단하는 것. 우리가 흔히 쓰는 지혜의 개념
방편반야 : 중생의 고통을 없애는 교화방편. 보통 방편이라고만 사용됨
실상반야 : 제법의 실상 그 자체.
보는 자와 우주만유가 하나로 통일되어, 보는 자도 우주의 일부가 되어 버릴 때 그것이 실상반야임.
반야에는 실상의 개념, 관조의 개념, 방편의 개념 등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지혜란 사물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힘, 사물의 실상을 바르게 인식하는 힘을 말합니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을 어리석음이라 한다면,
플래쉬를 비춰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보는 것을 지혜라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사리를 비추어 보는 지혜를 관조반야(觀照般若)라 합니다.
관조반야는 우리가 보통 말하는 ‘깨달음’의 개념입니다.
완전하게 깨달으면 중생에게 현재 상황에 맞는 지혜를 줄 수 있습니다.
즉, 서울은 어디에 있고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모여 있는 지 정확히 안다면,
서울 가는 길을 인천사람에게는 동으로, 수원사람에게는 북으로 가라고 말해줄 수 있듯이,
중생의 고통과 번뇌를 상황에 맞게 구체적으로 치료해주는 지혜를 방편반야(方便般若)라 합니다.
반야를 관조반야와 방편반야로 나누어 말한 것은 우리의 인식 때문이지 사실은 하나입니다.
여기 물체(대상, 色)가 있고 그것을 인식하는 ‘나’가 있어 내가 이 물체를 인식한다,
이럴 때는 반드시 인식하는 주체인 ‘나’와 인식이 되는 객체인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아직도 아상이 허물어지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은 다 아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설명해야 이해가 됩니다
근데 아상이 사라지면 보는 ‘나’라든지, 보이는 ‘대상’이라든지 하는 게 없어져 버리는데,
그게 어떤 상태인지 보는 ‘나’를 갖고 있는 우리로서는 쉽게 이해가 안 됩니다.
술을 먹어야 되느냐 먹지 말아야 되느냐, 오직 이 둘 밖에 생각을 안 하는 사람에게,
그 두 개를 다 놔버리라고 하면 도대체 어찌해야 하는 것이냐고 도리어 반문할 것입니다.
우리는 늘 이쪽이나 저쪽으로 분별해서 보기 때문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려고 하는데,
그 둘을 놔버려야 됩니다.
그런 것처럼 아상을 내려놓으면 보는 ‘나’와 보이는 ‘대상’이 같이 사라져 버립니다.
분별이 사라지니 ‘나’와 ‘너’가 없어져버리고,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객체가 사라져버리는 것을
한마디로 ‘반야’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걸 이해하려고 할 때는 나누어서 말합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볼 때, 어리석기에 실상을 보지 못하고 허상을 보게 됩니다.
이 어리석음이 걷히면 허상이 사라지고 실상을 보게 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실상반야(實相般若)이고, 그것을 보는 바른 눈은 관조반야입니다.
근데 실제로는, 허상이 사라지면 보는 ‘나’라든지 보이는 ‘대상’이라든지 하는 분별이 같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이것은 실상이고 이것은 관조다 이렇게 나눌 수가 없고, 그냥 한마디로 ‘반야’ 이렇게 말합니다.
제법을 아는 지혜와 중생의 아픔을 치료해주는 지혜도 하나로 되어있습니다.
비유를 들면, 밝은 거울은 관조반야이고 물건이 거울에 비치는 것은 방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울 앞에 시계가 오면 시계가 비치고 손수건이 오면 손수건이 거울에 비치듯이,
부처님께 중생이 가면 그 고뇌에 따라 해탈의 길을 다르게 알려주시는 데, 이것을 방편이라 하며,
듣는 이의 근기에 알맞은 교법을 말하여 주는 것을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 합니다.
방편은 인연을 따라서 일어나는 진리입니다.
분별관을 갖는 우리는 반야를 실상, 지혜(관조), 방편이라는 세 가지 개념으로 이해하는데,
일반적으로 방편은 방편, 실상은 실상(진리, 법신, 실상, 공, 연기)이라고 쓰기 때문에,
반야는 주로 관조반야(지혜, 깨달음)를 지칭합니다.
그러나 원래는 이렇게 세 가지로 분리되지 않는 그 자체를 ‘반야’라고 합니다.
(제4강에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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