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대학가요제에 이상은이라는 가수가 나왔습니다.
키는 멀대같이 크고, 선머슴같이 껑충껑충 뛰며 '담다디'라는 노래를 불렀지요
그 곡을 끝으로 브라운관에서 사라졌는 데, 한참 후에 갑자기 TV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여행가로 변신하여 나레이션을 하며 유럽의 어느 성을 방문했지요.
먼발치에서 절벽 위의 성을 바라보다가, 스케치북을 꺼내더니 쓱쓱 멋진 그림을 담습니다.
너무 부러웠지요.
지난해 수원 화성을 한 바퀴 돌 때였습니다.
방화수류정 밖에는 연못이 있고, 그 연못을 따라 사람들이 산책도 하고, 사랑을 속삭이기도 하고, 아이들과 단란한 한 때를 보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눈 앞에 다른 모습이 들어왔어요.
어느 여인이 귀에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들으며 눈앞의 '방화수류정'을 스케치 북에 담고 있었습니다.
너무 부러웠습니다.
내 글씨도 잘 못알아 볼 정도로 천하의 악필인데다가, 직선도 반듯이 그을 줄 모르는지라,
그림이란 환쟁이들이나 그리는 것으로 애써 치부하고 외면하고 있었는 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10년 쯤 후에,
등에는 배낭을 메고, 아내와 손잡고 유럽의 시골길을 걷다가,
눈 앞에 나타난 석양 빛의 고성에 취해 한참을 바라보다가,
카메라 셔터는 잊은 채,
배낭에서 작은 스케치북을 꺼내어
쓱쓱쓱쓱,
이국의 풍경을 화폭에 담아보는 소박한 상상....
생각만해도 너무 멋있습니다.
당장 책부터 사려고 인터넷 교보문고에 들어가 찾아보고,
아내에게도 이야기했죠.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고....
하아, 그런데 아내는 항상 나보다 한 발 빠릅니다.
벌써 책을 사놨답니다. 세 권씩이나 사놨습니다.
본인도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나 어쩐다나....
그러나, 역시나 아내의 책은 장식용입니다. 서너 페이지 밑줄이 그어졌을 뿐, 나머지는 새 책 그대로입니다.
아내가 사놓은 책을 펼쳐 보았죠.
그림의 수준을 보니 내겐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내 수준에 맞는 왕초보용 책들을 샀습니다.
김충원님의 <스케치 쉽게하기 - 기초 드로잉>에는 이런 글들이 적혀있습니다.
너무 좋은 말들이라 조금 많이 인용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즐거움은 재능과 상관없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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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예술적 창조는 독창적인 상상력과 훌륭한 기교가 조화를 이루어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받아왔던 미술 교육은 지나치게 상상력과 창의력만 강요했고,
그것을 표현해 내는 수단인 기교는 늘 뒷전에 밀려 독창적인 시각만 있다면 그림은 저절로 그려지는 것으로 믿게 만들었습니다.
음악교육에 있어 기교의 중요성은 절대적이지만 미술에서만큼은 소중한 기교의 가치와 의미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되었습니다.
때문에 자신의 생각과 이미지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은 당황할 수 밖에 없고,
결국 좌절을 맛보며 영원히 미술과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창의력이나 개성적인 시각은 누군가에게 배우기보다는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교나 기법은 효과적으로 배울 수 있으며 어떤 식으로든 표현 방법을 익히고 난 다음부터는 여러 가지 회화적 가능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아가 사물을 새로운 방법으로 인식할 수 있는 개성적인 시각과 창의력까지도 키울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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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나 빈센트 반 고흐도 분명 한 때는 여러분처럼 처음 연필을 잡고 스케치를 배웠을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은 세계적인 화가나 이제 막 미술 연필을 잡은 여러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미술에 실패란 없습니다.
성공적인 그림을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평생 동안 그리기를 배우고 익힌다는 느긋한 마음가짐으로 천천히 즐기면서 작은 성과에도 크게 만족할 줄 아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내게 꼭 맞는 멋진 말들입니다.
용기백배하여 연습에 들어갑니다.
그림그리기의 첫 단계는 선긋기입니다.
그런데, 선긋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도 날마다 연습합니다.
조금씩 발전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스스로 다짐해봅니다
3년 후 어느 따뜻한 봄날에
화구를 챙겨들고 수원 화성에 가서,
작년에 보았던 그 여인네처럼,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방화수류정'을 스케치북에 담아오겠노라고...
그런데 벌써부터 고민입니다.
그 때 들을 음악은 비발디의 사계가 좋을까,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좋을까???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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