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아침과 여행의 아침은 무엇이 다를까?
일상 :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하고 밥 먹고 출근하기 바빠 창밖을 내다볼 겨를이 없다
여행 : 전날 떡이 되도록 술을 마셨어도 아침에 일어나면 커튼을 걷고 창밖을 내다본다
둘째 날 아침, 일기예보에서는 분명히 비가 오지 않는다고 했는데 잔뜩 흐린 하늘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회색 하늘과 회색 바다, 우리와 같은 듯 다른 느낌의 건물들, 우리와 다르나 같은 느낌의 나무들,
창밖의 이국 풍경을 보며 셔터를 누르고 있는데 아내는 어젯 밤의 실수를 낱낱이 얘기합니다, 꽁알꽁알 ~~
난 짐짓 모르는 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딴소리를 합니다,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흔히 먹는 호텔의 아침식사이지만 블라디보스톡에서 먹은 6끼 중 가장 맛있는 식사였다고 할까,
아내 수첩 속 기록엔 "8:30 조식. 치즈 토마토 콩 카푸치노 요플레, 맛있음"
내 머릿 속 기억엔 "계란, 햄, 베이컨, 소세지, 주스, 커피, 탄수화물은 No!"
숙소를 나선 시간은 아침 10시, 둘째 날이자 마지막 날의 일정이 시작됩니다.
맨 먼저 도착한 곳은 <혁명광장>,
엄청 넓은 광장인데 사진엔 반의 반도 안 나왔습니다.
요럴 줄 알았으면 원경으로 잡거나 파노라마로 한 컷 잡을건데 ~~
혁명광장, 정식 명칭은 <극동 소비에트 정권 전사 광장>인데 사람들은 흔히 '중앙광장'이라고도 한답니다.
러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한 기념으로 만들어진 시민 광장으로,
블라디보스톡 생활과 행정의 중심권에 위치하고 있어, 광화문 앞이나 시청 광장과 같은 위상이다,
1937년 스탈린이란 놈이 17만명 이상의 고려인들을 강제 이주 시킬 때 이곳에 집합시켰었다하니 그리 기분 좋은 장소는 아닙니다.
1961년 광장 북쪽에 건립한 <혁명전사 기념비>는 세 개의 동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왼쪽의 동상은 러시아 제국의 독재에 저항하는 볼셰비키 노동자들을 묘사하고 ~~
오른쪽의 동상은 1922년 블라디보스톡을 침략한 일본군을 물리친 용사들을 나타내고 ~~
소비에트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를 기념하기 위한 동상이랍니다.
'혁명은 1917년 모스크바에서 시작하여 1922년 이곳에서 완성되었다', 이 말에는 블라디보스톡의 자부심이 들어있겠지요.
광장 동쪽에는 스파소 프레오브라젠스키 성당(= 구세주 변모 축일 성당)이 있는데,
러시아 정교회의 15대 총대주교였던 알렉세이 2세가 2,000년도에 블라디보스톡에 와서 봉헌하였지만,
정작 공사는 2011년에 시작하였는데 가운데 돔의 높이만 14m이고 무게는 38톤, 전체 건물 높이는 67m로,
2,000명의 신도가 동시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엄청난 규모로 짓고 있다 합니다.
진작 공사가 끝났어야 하지만 자금 조달이 어려워 아직도 공사중이랍니다, 물론 준공 예정일도 미정.
가이드의 설명이 끝나고 잠시 자유시간,
한글로 적힌 '기념품 가게'의 마트료시카는 얼마나 예쁜가 보려 했더니 아직 개장 전 ~~
대신 지구상에서 제일 예쁜 마트료시카를 보면서 아쉬움을 달래시길 ~~ ㅋㅋ
광장의 남쪽에는 빨간 몽골텐트가 수도 없이 널려 있어 도대체 뭐하는 곳인가 보려 했더니 ~~
갑자기 폭풍이 일고 빗줄기가 거세집니다.
우산은 훌러덩 뒤집어지고 묶어둔 마트료시카는 기우뚱 쓰러집니다.
아직도 아베 쨔샤의 심술통은 계속 되나, 우린 황급히 지하도로 들어가 잠시 휴식 ~~
비가 조금 잦아들자 찾은 곳은 <잠수함 박물관>,
2차 세계대전 승리 30주년을 맞은 1975년에 퇴역한 잠수함을 박물관으로 바꾸어 개장했는데,
1936년에 건조하였고 2차 대전 중 독일 함선 12척을 침몰시킨 소비에트 S-56급으로,
2,000마력 디젤 엔진 2기와 550마력 전기모터 2기로 움직이며 최고속도는 19.5노트(시속 36km),
전체 길이는 77.8m이며 승선인원은 50명이었다는데,
중요한 정보 하나, 공짜가 아닙니다, 입장료가 무려 100루블(약 2천원).
안으로 들어가 구경을 하는 데 별 것 없어요, 그냥 슬렁슬렁 지나가다가 ~~
코 큰 아저씨를 발견했습니다.
코를 잡은 이유? 글쎄요, 아들 낳을 나이는 지난 것 같은데 ~~
아니지, 뉴스에 보니 인도에선 70 넘은 할머니가 쌍둥이를 출산했다고 하니 아직 가능성은 다분히 있어요.
에구구, 이러다 왕언니한테 한 대 쥐어박힐라, ㅎㅎ
그려, 반짝이는 네 코보다 내 코가 더 낫지?
오매, 내 코가 더 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네 ~~
잠수함 내부는 몇 개의 칸으로 나뉘어 있고, 누수시 차단할 수 있는 튼튼한 문이 달려있습니다, 드나들 때 머리 조심!
내가 노가다 40년 경험으로 말하건데, 출입문은 안목치수로 1,000mm일 것이다, 아니면 말고 ~~
배관에는 엄청 많은 밸브들이 달려있습니다. 무슨 용도인지 외우는 데도 한참 걸렸을 듯 ~~
이 배에는 총 12개의 어뢰가 실려있었답니다.
때는 바야흐로 2010년, 그 중 1개가 감쪽같이 사라져, 그걸 찾느라 승무원 50명이 총동원되어 동분서주 똥줄 탔습니다.
하늘로 올라갔나 땅속으로 꺼졌나 어느 놈이 바닷속에 버려버렸나 귀신 곡할 노릇이었는데,
알고보니 김정일이가 쥐도 새도 모르게 훔쳐다가 자기들이 만든 것이라고 매직펜으로 '1번'이라고 써놓다네요.
그걸 어디에 썼느냐, 세계에서 제일 무서운 미군이 한국군과 같이 합동훈련을 하고 있을때
잠수함에 실어 살금살금 내려가 '천안함'에다 냅다 쏜 후 살벌한 감시망을 뚫고 유유히 올라갔답니다.
거짓말 같지유? 그럼 믿지 마세유 ~~
잠수함 박물관 옆에는 <영원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희생당한 병사들을 기리기 위함인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 불어도 '365일 꺼지지 않는 불꽃'을 피우려 했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 가스 공급이 중단되어 잠시 꺼진 적이 있었다니
이 세상에 '사상'보다 더 무서운 것은 '돈'이 아닐까 ~~
영원의 불꽃 뒤에 보이는 건물은 <사도 성 안드레아 소성당>입니다.
이 성당은 흐람(작은 기도소)이라고도 하는데 누구든지 들어가 간단히 기도할 수 있답니다.
고개를 돌리면 조금 떨어진 곳에 보이는 <니콜라이 2세 개선문>,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한 기념으로 1891년 건립했다는데,
지붕 위에는 독수리 두 마리, 앞면엔 러시아 수호성인 '성 니콜라스'의 얼굴, 뒷쪽에는 호랑이가 조각되어 있는데,
이 문을 지나는 사람에게는 성공과 행복이 온다는 감미로운 전설이 전해지고 있답니다.
가이드가 시간없다고 하도 독촉하는 바람에 가까이 가보지도 못했지만 ~~
사진만 찍어도 성공과 행복이 절반쯤은 이루어지리라 굳게 믿고 또 믿습니다.
버스를 타려는데 가이드가 잠깐만 기다리라 합니다.
갑자기 "꽈광~~!"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천둥 벼락 소리가 납니다.
큰일 났다, 아베란 녀석이 기어이 전쟁을 일으켰구나, 2차 러일전쟁,
왜놈들 총에 맞아 이역만리 블라디보스톡에서 죽을 수는 없고,
비행기도 뜨지 않을텐데 돌아갈 길이 막막하구나,
걸어서 걸어서 두만강 건너고 북한땅 지나고 휴전선 넘어서 갈까나,
돛단배 하나 훔쳐서 달보며 별보며 노저어 동해 바다 지나서 갈까나,
열심히 머리 굴리고 있는데 가이드 왈, "매일 낮 12시에 해군에서 포를 쏩니다, 일종의 세리머니이지요 ~~"
블라디보스톡 역으로 가는데 저만큼 건너편에 홀로 서있는 이가 있었으니 그 이름도 유명한 <레닌>
그는 저 먼 곳을 가리키며 외칩니다, "저기 우리의 낙원이 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손등에 앉아 있는 비둘기가 답합니다, "단결하면 뭐하냐, 느그들 쫄딱 망했잖아 ~~"
공산주의, 모든 것을 자본주의에 넘겨준 지 오래, 심지어 북한에서조차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이 헛되이 사라지지만은 않았지요,
그들 덕분에 노동자의 권리를 당당히 주장할 수 있는 세상이 왔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합니다.
TV를 보다가 어느 분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나 자신도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나라 매스컴은 이렇게 말하지요,
노조가 월급 3,000억원 더 받으려고 파업해서 회사에 7조원 손실을 끼쳤다,
같은 사건을 보는 서구의 언론은 논조가 전혀 다릅니다.
사용자가 인건비 3,000억원 아끼려다 협상이 깨져 회사에 7조원 손실을 끼쳤다.'
봉급 나오기만 손꼽아 기다리며 사는 나도 우리나라 매스컴의 논조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으니,
세뇌 교육이란 참 무서운 것입니다.
이 다리 지나고 저 건물 지나 뒤안으로 가면 블라디보스톡 항구,
항구에 오니 자연스레 나오는 뽕짝 한 가락, "목포는 항구다, 블라도 항구다 ~~"
그 항구에서 기념사진 한 장 남깁니다.
이 대목에서 그동안 공부하고 익힌 사진찍는 요령 한 가지,
보통 사진 찍을 때 보면 배경을 크게 넣으니 사람은 작게 나와 표정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단체사진을 볼 때엔 어떻습니까, 배경은 차치하고 내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확인할 것입니다.
배경을 챙기면 사람이 작아지고, 표정을 챙기면 배경이 사라진다,
그 둘을 다 가지는 방법이 없을까, 있습니다.
이렇게 해보세요, 배경은 배경대로 찍고 ~~
인물은 인물대로 찍되, 가능하면 얼굴이 크게 나오도록 찍으세요, 20년 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필름 값 들지 않으니 여러 장 찍으세요, 그 중 한 장만 건져도 여행경비는 충분히 빠질 것입니다.
그나저나 이 친구 아니었으면 우리 부부 사진은 한 장도 없을 뻔 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톡 항구 앞에는 블라디보그톡 역이 있습니다.
여기는 그 앞모습이고 ~~
여기는 그 뒷모습입니다.
이 대목에서 잠시 옆길로 빠져 위급했던(?) 이야기 하나,
항구에서 화장실에 들어가려는데 입구에서 돈을 내라 합니다, 유료 화장실.
근데 돈(루블)이 한 푼도 없어요, 할 수 없이 밖으로 나와 환전소를 찾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혹시 저기는 공짜이지 않을까, 바로 옆에 있는 블라디보스톡 역으로 향했습니다.
출입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나오기에 그 문으로 들어갔는데 험상궂게 생긴 사람이 인상을 박박 쓰며 나가라고 손짓합니다.
왜 그럴까, 뭘 잘못했나, 알고보니 여기는 들어오는 문과 나가는 문이 별도로 있습니다.
역사 안으로 들어가려면 X레이 검사대에서 소지품 검사하고 이상이 없어야 통과시켜 줍니다.
안으로 들어가 화장실을 찾아 헤매다가 지하층에 내려가서야 겨우 발견, 들어가려는데 여기서도 돈을 받습니다.
키가 아주 작은 할마씨가 지키고 있는데 달러를 보여주었더니 전혀 못 알아먹는 말로 쏼라쏼라 합니다.
할 수 없이 다시 밖으로 나온 우리, 두리번거리니 큰 길 건너 저만큼 수퍼마켓 간판이 보입니다.
'그래, 저기 가서 뭐 하나 사고 화장실을 물어보자', 안에 들어가마자 아내는 일하는 사람 붙잡고 "토일렛!"을 외칩니다.
그 아가씨는 밖을 가리키며 뭐라뭐라 하지만 우린 멀뚱멀뚱, 답답한 지 밖에 까지 나와 저 윗쪽으로 가라고 손짓합니다.
너무 급하여, 고맙다는 말도 미처 끝내지 못하고 종종걸음으로 올라가보니 진짜로 있어요, 그래서 겨우 위기를 넘겼답니다.
실전 경험에서 나온 중요한 팁 하나,
블라디보스톡에 가면 반드시 10루블짜리 현지화 몇 장 정도는 가지고 다녀라!
이 열차같이 생긴 것은 <철도 노동자 기념비>라 하고 ~~
그 앞에 있는 요건 <시베리아 횡단철도 종점 기념비>라 하는데,
아래에 9288이란 숫자가 적혀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여기서 모스크바까지 거리가 9,288Km,
별로 멀지 않다고요? 적도를 따라 지구를 한 바퀴 빙 돌아도 40,000Km밖에 안 됩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종착역에서 잠시 기다리니 ~~
우리가 탈 열차가 들어와 탑승,
들어가 보니 한 줄에 의자가 여섯 개나 있습니다, 우리보다 두 개나 더 많아요.
이유는? 철로 폭이 넓어서 가능한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철도는 표준궤로 궤간거리 1,435mm,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광궤로 1,524mm,
여기서 드는 의문점 하나,
궤간은 겨우 85mm 넓어졌는데 의자가 2개나 늘어나다니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닐까, 기우뚱거리다 뒤집힌다든지 ~~
뒤집힌 뒤 찌그러지기 전, 온전한 모습일 때 한 컷 남겨두자!
(이 원앙만 두 컷 올린 이유 : 우리 부부 사진 찍어줬기 때문)
스르륵, 열차는 미끄러지고 창밖을 보던 나는 잠시 생각에 잠깁니다.
이 철길을 따라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데 밤낮으로 달려도 7일이나 걸린다,
열차안에서만 일주일을 보내야하니 시베리아 횡단 여행이 너무 지루하겠구나,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캠핑카를 몰고 가면 어떨까, 가다가 좋은 곳 있으면 쉬고, 가다가 피곤하면 한숨 자고,
그렇게 쉬엄쉬엄 가더라도 한 달이면 모스코바에 도착하지 않을까 ~~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 세단카(Sedanka)역에 도착 ~~
우리를 태워온 완행열차는 기적도 없이 떠나고 ~~
구름다리 지나 밖으로 나오니 바다가 펼쳐집니다, 정확히는 아무르스키만 ~~
지금은 손녀딸이랑 같이와 맛있는 것 먹으며 여름 해를 즐길 수도 있고, 빤쓰만 입고 물에 들어가 헤엄칠 수도 있지만,
겨울엔 어림도 없습니다, 바다마저 꽁꽁 얼어 저 건너까지 걸어서는 물론 차 타고 건널 수도 있답니다.
그 곳에서 독사진도 한 컷 찍고 ~~
단체 사진도 한 컷 찍은 우리는 ~~
언제일 지 모르지만 다음 다음에, 부산에서 열차타고 이 철길 횡단하기를 꿈꾸며 버스에 올랐습니다.
신한촌(新韓村)
-. 일제강점기에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 자리잡고 있던 한인집단 거주지.
-. 이상설, 최재형, 신채호, 안중근 등 항일 민족 지사들의 집결지였고 국외 독립운동의 중추 기지였음
-. 초기에 6만3천 명의 한인들이 거주하면서 조선인 학교를 세웠고 우리말 신문들도 발행
-. 1922년 연해주에는 조선인을 위한 학교가 45개였다가 1927년에는 267개로 급증
-. 1937년 극동 한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로 신한촌이 폐쇄될 때까지 신한촌에서의 한인 활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됨
현재는 대규모 아파트 밀집지역으로 변모해 과거 한인의 거주 흔적은 찾기가 어렵고 기념비만 하나 남아 있는데,
우리 앞에도 있고 우리 뒤에도 있고, 한국에서 온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1995년 처음 블라디보스톡을 찾았을 때, 신한촌 기념 표지 하나 없이 폐허가 된 모습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난관이 있었지만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1999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기념탑을 건립하고 제막식을 가졌다.
“사실 연변이나 연해주 등지는 과거 우리 한민족의 터전이었습니다. 고구려가 있었고 해동성국 발해가 있던 곳입니다.
오랜 시간 한민족이 살아온 연변이나 연해주 땅에 우리 민족의 기록을 남기고 기억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 기념비를 만드는데 앞장 선 이윤기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연해주 신한촌 기념탑
"민족의 최고가치는 자주와 독립이다.
이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은 민족적 성전이며, 청사에 빛난다.
신한촌은 그 성전의 요람으로 선열들의 얼과 넋이 깃들고, 한민족의 피와 땀이 어려 있는 곳이다. ~~"
* 기념비는 대한민국, 북한, 재외동포를 상징하는 대리석 기둥 세 개와, 조선 팔도를 의미하는 작은 돌 8개로 조성됨.
우린 꽃을 한 송이 올리고 ~~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부르고, 가이드의 설명을 경청했습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독립운동은 못 했어도 불매운동은 한다!"
가난하다고 돈 벌러 왔다고 우리 말이 서툴다고, 연변에서 온 조선족들을 무시하고 함부로 하는 사람들, 참 나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몇 배나 더 훌륭한 사람들의 후손입니다.
왜놈 시절, 대부분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이 만주로 간도로 연해주로 건너갔습니다.
그렇게 간 사람들의 생활이 오죽했을까만은 그 힘든 중에도 한 푼 두 푼 모아 독립군들을 후원하고 그들을 도왔습니다.
청산리 전투, 봉오동 전투에 승리한 우리 독립군은 정말 대단했고, 전사에 기록되고 교과서에 까지 나옵니다.
그러나 그 후, 왜놈들은 그들을 도왔다는 명목으로 수도 없이 많은 조선족들을 죽였지만 누가 희생당했는 지 그 기록마저 희미합니다.
한반도의 먹물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씩 둘씩 변절했습니다, 36년이 너무 길어서 희망이 없어서 그랬다 합니다.
그러나 만주 땅의 못 배운 민초들은 왜놈들이 항복한 그 날까지 독립군을 도왔고 변절하지 않았습니다.
36년이나 되는 긴 시간이 흘렀는데, 우리 기록을 보면 일제와 싸운 독립운동가들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적었을까, 아닙니다, 1950년에도 만주 땅에는 귀국하지 않고 남아있는 독립군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6·25 직전 김일성의 요청으로 모택동은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던 조선의용군을 포함한 6만5천 명의 조선족 군인들을 북한에 보내주었음)
우리에게 그들은 모두 잊혀졌습니다.
남한 땅에서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이승만이 반공의 기치아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이름조차 꺼내지 못하게 했고,
북한 땅에서는 6·25 전쟁 후 김일성에 반대하는 독립운동가들을 모조리 숙청하여 그 이름들이 사라져버렸습니다.
통일이 되면 아니 통일의 분위기라도 형성되면, 맨 먼저 해야 할 일이 역사에서 지워진 분들을 살려내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둥아리로만 떠드는 나는 참 부끄럽습니다.
여행후기가 너무 무거워졌습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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