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차 성지순례는 아침 8시에 수지를 출발하여
남한산성 -> 구산성지 -> 마재성지 -> 다산 유적지를 돌아 저녁 7시에 집에 도착하는 일정이었습니다.
그 첫 번째로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위치한 남한산성 성지 입니다.
남한산성은 집에서 가까운 유원지이기에 몇 번 왔지만, 이 곳에 성지가 있는 지는 몰랐습니다.
"광주 지역은 삼국시대 이래로 지리상 요충지였으며, 조선 중기인 1577년(선조 10년)에 광주부가 설치되어
지방관인 부윤(府尹, 종2품)이 상주하다가 1623년(인조 1)에 유수부로 승격되면서 경관인 유수(留守, 정2품)가 파견되었다.
현재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에 속해 있는 남한산성은 한양의 군사적 요지로 1595년(선조 28)에 현재와 같은 성곽이 축조되었고,
1621년에 대대적인 개축공사가 있은 뒤 1626년(인조 4)에 광주 유수의 마을이 성안으로 이전되었다.
이후 광주는 1636년의 병자호란 이후 한때 부윤으로 복구되었다가 1750년(영조 26)에 다시 유수부로 승격되었다.
이처럼 광주 유수의 치소가 이전되면서 남한산성은 천주교 박해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고,
박해 때마다 여러 곳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순교함으로써 잊을 수 없는 "순교 터"가 되었다.
이미 최초의 박해인 신해박해(1791년) 때부터 신자들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다는 전승이 내려오고 있으며,
신유박해(1801년) 때에는 이곳에서 최초로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이어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에 이르기까지 약 300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하게 되는데,
불행히도 그 행적과 성명을 알 수 있는 순교자들의 수는 극히 적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갖은 형벌을 당한 뒤에 칼로 목을 베는 참수(斬首),
목을 매어 죽이는 교수(絞首), 매로 때려 죽이는 장살(杖殺) 등 여러가지 사형으로 영광의 순교를 얻었다.
특히 병인박해 때에는 너무 많은 신자들이 잡혀 오자,
형을 집행하는 포졸이나 군사들마저도 피를 보는 데 진저리를 내고 새로운 사형 방법을 생각해 냈으니,
이것이 바로 어느 법전에도 나타나지 않는 백지사(白紙死)였다.
이것은 사지를 묶고 얼굴에 물을 뿌린 뒤에 한지를 덮는 일을 거듭하여 숨이 막혀 죽도록 하는 방법이었는 데,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는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남한산성 순교역사>에서
<성당 전면 모습>
<성당 입구. 그런데, 철문이 눈에 거슬립니다.>
<한옥형식의 멋진 성당이라 카메라에 담고 싶었지만 각도 잡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더구나 이 곳의 모든 음식점들은 한옥으로 되어있어, 멀리서 보면 이층집 음식점으로 착각하기가 쉽습니다.>
<성당 들어가기 전에 위치한 순교자 현양비>
<순교자 현양비 아래에 적힌 순교자 명단
"~~~ 외 무명 순교자 300여 분">
<성당 안에서는 미사 중입니다.>
<성당 내부 제대>
<그리고 성모님상>
<성당 밖에도 또 성모님이 계십니다>
<야외 미사터>
<야외 미사터 뒷 쪽의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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